[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지난 한 해 한국은 너무 많은 사건 사고를 겪었다. 나 또한 지난 한 해는 내 인생에서 결코 잊힐 수 없는 한 해이기도 했다. 소설 속 문장처럼 삶에서 무언가 큰 사고 혹은 변화를 겪은 사람은 이 문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비행기 사고로 가족과 연인을 잃은 자는 삶이 정말 덧없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은 언제 어떻게 나에게 닥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이런 일을 남일처럼 생각하며 앞만 보며 살아간다. 그런데 신경 쓸 시간에 나의 일과 가족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래서 누가 죽든지 나라가 개판이 되든 무슨 상관인가 나만 잘 살면 되지, 오히려 이런 상황을 기회로 역이용해서 돈 벌 궁리를 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다. 남의 불행을 애도하거나 걱정할 시간보다 자신의 사익을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자본이 인본 위에 선 나라는 결국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해진다. 세상만사 다 신경 쓰고 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만 생각하고 살 수도 없다. 적어도 이웃과 주변에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남일에 신경 좀 끄고 살아야지”
“정말 남일 같지 않네요”
이 두 문장은 둘 다 그럴듯해 보인다. 인생을 살면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그런데 두 문장은 문장만 보면 아주 이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건 문장이 쓰이는 상황과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남일에 신경을 끄라는 것은 남들의 가진 것과 허세에 신경을 끄고 자신이 소신과 신념을 지켜며 살아가라는 의미에 적합할 것이다. 남들의 시선에 얽매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쫓으며 살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불행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후자의 상황에서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이다. 먹고살기 힘들고 바쁘다는 이유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매정하고 차가워지는 결국 자신이 먹고살기 힘들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웃긴 사실은 이 먹고살기 힘들다는 생각은 되려 앞에서 설명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모순이다.
자신이 남들과 비교하며 신경을 쓰기 때문에 살기 힘들다 느끼면서 또 다른 남일, 즉 자신보다 불행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과는 비교하고 신경 쓰지 말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만약 이것이 모순을 품지 않으려면 이런 사람은 자신 보다 더 가지고 힘이 있는 사람도 자신보다 못 가지고 힘없는 사람도 다 신경을 꺼야 맞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못 가진 자와 힘없는 자들에게 신경 끄고 살아야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것은 나중에 자신의 그런 불행과 위기에 처할 상황과 가능성만 높인다. 그건 당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당신의 주변에서도 당신을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개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57p-
나는 이 주인공 펄롱과 그의 아내가 나누는 대화를 읽으면서 문득 과거 읽었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독후감)가 떠올랐다. 클레어 키건은 이 소설을 읽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장면은 구두장이 세몬과 그의 아내 마트료나가 나누는 대화와 너무도 닮아 있다.
“마트료나, 당신 마음엔 하나님이 없단 말이요?”
- 레프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
추위 속에 거리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거지를 집으로 데려온 남편에게 핀잔을 쏟아내는 아내의 모습은 키건의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내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비친다. 그들은 자신들이 넉넉하지 않고 그들의 안전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틀리지 않다. 우리는 정답을 맞히면서 살아오라고 오랜 시간 교육받아온 결과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대로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오답을 선택한 결과는 평생의 꼬리표로 우리를 따라다닌다. 모든 것이 시험과 테스트의 결과로만 평가되고 판단되는 세상이 냉혹하고 각박하게 변해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삶은 전쟁과도 같다고 하지 않는가.
“원장님, 저희 때문에 바닥에 발자국이 남았습니다”
“괜찮아요” 수녀원장이 말했다. “더러움이 있는 곳에 복도 있다는 말도 있죠”
(중략…) 벽난로 선반 위에는 교황 바오로 2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74p -
소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수녀들이 소외된 자들을 더욱이 같은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모습 때문에 더욱 큰 공분을 사게 만든다.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일반 서민들이 그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신을 섬긴다는 인간들의 그런 행동들을 일삼는다. 그것이 용납될 수 없는 건 사람들의 존경의 대가로 생계를 유지하고 명망과 권위를 누리기 때문이다. 위선과 가식이다.
초심은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타락하는 이유는 먹고살만해지면서부터 시작된다.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기독교는 극심한 탄압과 억압 속에서 더욱 간절하게 피어났다. 하지만 기독교가 성행하고 떳떳하게 활개를 칠 때는 어김없이 부패와 타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던가.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신앙은 초심을 지키는 것이 더욱 쉽지 않다. 나는 신앙이 직업이 되는 것이 달갑지 않다. 신앙이 밥벌이가 되면서 종교라는 것이 생겨났고 종교는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비즈니스가 되어버렸다.
신앙이란 일상의 삶 속에서 그냥 녹아 있는 것이 되어야 맞다. 우리의 삶이 신앙과 분리되는 것은 신앙이 종교생활이라는 삶과 분리된 또 다른 직장 생활처럼 여기기 때문 아닌가? 그렇게 종교인은 일반인의 삶과 조금씩 동떨어져 간다. 비종교인이 종교인을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 아닐까? 서민의 삶과는 동떨어져서 살면서 화려한 의복과 높고 넓고 웅장한 강단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며 떠들어 댄다. 삶은 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예수도 제자들과 삶 속에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뒷짐 지고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한테서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한다고, 미시즈 윌슨이 말하곤 했다”
- 클레어 키건 [이도록 사소한 것들] 중에서 100p -
주인공 펄롱은 자신의 어머니를 거두고 보살펴 준 미시즈 윌슨이라는 선량한 자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태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선량한 누군가가 있었기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도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신의 결정이지만 그 신은 항상 선량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은혜를 베푼다고 말한다. 그건 신이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마음을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실천될 때 누군가는 그 사랑을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게 된다. 펄롱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누군가의 사랑 덕분이었고 그것은 자신 다시 되갚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마태복음 24:12] -
사랑이 식으면 시기와 미움이 그 자리를 차지 하기 마련이다. 그럼 사람들은 부도덕과 불법까지 행하면서 타인을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증식시키기 위한 도구로 희생시켜 버린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세상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런 개인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다스리면 그 가정과 사회와 국가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만 사랑하고 타인을 보지 않는다. 결국 그 화살은 내가 아니라도 나의 가족과 자녀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내 자녀의 자녀에게라도 돌아오게 되어있다. 그때는 아마 당신이든 당신의 자녀이든 그 차갑고 냉혹한 세상에 분노와 증오를 쏟아낼 것이다. 그 다른 타인이 그러했듯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마태복음 22:39] -
그럼 그때엔 이 구절이 이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와 나의 가족은 그럴 일 없을 거야, 남의 도움은 필요 없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 열심히 번 돈으로 위험에 대비해 여러 보험 상품과 안전한 주거환경과 안전한 음식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준비도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것이 신이 인간을 현재만 살게 만든 이유이다.
사랑이 사라진 곳을 법과 질서로 다스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는 지금 그 모습을 너무도 잘 경험하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법치도 인본 위에 가능한 것이다. 자본과 법치로만 돌아가는 세상은 결국 인간이 본질이 아닌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십계명에서 시작한 법은 이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끝이 없다.
소설은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행과 폭력이 자행되는지를 일깨워준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한 양심과 타인을 향한 사랑만이 사회에서 악행과 폭력을 몰아내는 유일한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요한복음 13:34] -
아직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남 일처럼 여겨지는가?
그것이 남일 같이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