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 ep17
“这丫头又到哪儿去了?”(아놔~ 얜 또 어디 간 거야?)
나는 온천탕에 누워 눈을 감고 공상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그 사이 웬웬이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온천탕을 나와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다. 핸드폰도 탈의실에 놔두고 왔기에 연락을 할 수도 없다. 더욱이 웬웬이 나의 탈의실 사물함 키까지 가지고 가버렸다.
이제 곧 2시간이 다 되어 간다. 카렉이 우리와 약속한 시간은 2시간이었다. 카렉은 화산 마을 자신의 집에 볼 일이 있어 2시간 뒤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나는 웬웬을 찾으려 온천 단지 안을 돌아다녔다.
“雯雯,你在这儿干吗?”(웬웬! 너 여기서 뭐 해?)
“咦,你来了?”(어!? 왔어?)
“你来打个招呼吧,这位是救我命的””(인사해. 날 구해주신 생명의 은인이야)
“你好,初次见面”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你是中国人吗?”(중국사람이세요?)
“不是,我是韩国人”(아니요, 한국 사람인데요)
“嗬!那你怎么会说汉语呢?”(네, 그런데 어떻게 중국말을?)
“Well…sorry. Actually she taught me that Chinese expression before you come.”(음… 사실 방금 웬웬 님이 가르쳐 준거예요)
“ah… hahah”(아… 네 하하하)
웬웬이 온천 파크 안에 있는 바에서 한국 남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웬웬이 온천 단지 안 호수가를 거닐며 사진을 찍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 한국 남자가 몸을 던져 웬웬을 구해 주었다고 했다. 남자는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의 누가 봐도 첫눈에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비주얼을 가진 남자였다. 웬웬은 또다시 운명의 남자를 만난 것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이 년은 감정에 충실하다. 문제는 이 감정이 너무 출렁 된다는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하지만 이년은 파도 같다. 왔다 갔다 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출렁이며 갔다가 부서져 사라진다. 그런 웬웬이 부럽기도 하다. 파도치는 감정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며 부서지고 또 생겨나고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 난 갈대처럼 한 가지 감정의 뿌리가 깊이 박혀 어디로 가지 못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흔들리기만 할 뿐 어디도 가지 못한다.
그때였다. 나처럼 갈대의 감정이 뿌리 뻗기 시작한 한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물에 뛰어들어 그 여자에게 헤엄쳐 가는 장면이 나의 머릿속에 오버랩되고 있었다.
----- [드라마 속으로] -----
“푸아아! 아 사~ 살려주세~우읍”
“풍덩”
거친 파도와 함께 마리의 입 속으로 짠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들여 마셔야 할 공기는 들어오지 않고 염분이 가득한 물이 기도 속으로 차 들어왔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천천히 눈이 감기고 있었다. 그렇게 머나먼 타지에서 이렇게 홀로 객사하는 것인가, 그것도 물속에서. 물에 팅팅 불어서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죽는 건가.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갈 수는 있을까? 하는 온갖 잡생각이 그녀의 뇌가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이라 생각이라고 하니 너무 허망하다. 눈이 감기고 뇌의 전원도 꺼져버렸다.
“푸우우웃!”
“Are you Ok?” (괜찮아요?)
“짝짝짝”
“짝짝짝 Wow~ Great!” (와우 대박!)
그런데 다시 눈을 떴다. 다시 깨어났다. 마리는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어떤 걸까 항상 궁금했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 보니 그 기분은 마리가 여태껏 상상해 오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새하얀 고요함 속에서 눈을 뜨며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눈앞에는 코밑부터 턱까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고 그 뒤로 수많은 군중이 자신을 바라보며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입안에는 짠내가 진동을 하며 계속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리고 입 주변이 너무도 따끔거리고 아팠다. 그런데 마리 주변을 둘러싼 군중들이 깨어난 마리를 보며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푸우웃~”
그때 순간 다시 마리의 입 안에서 분수가 치솟았다. 그때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 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 남자의 입 속으로 마리의 분수물이 튀었다.
“우욱 퉷퉷! 真是的.” (아 진짜~!)
남자는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며 뒤로 벌러덩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 남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당신은 혹시? ”
그 남자는 항상 마리의 꿈속에 나타나는 그 남자였다. 수염이 덥수룩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꿈속에서는 항상 매끈한 얼굴에 정돈된 머리 깔끔한 정장과 구두를 신은 모습으로 자주 등장했기에 자칫 못 알아볼 뻔했다. 그는 먼지와 얼룩이 잔뜩 묻은 형광색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작업복이 바닷물에 젖어 구정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咦! 你不是那个?!”(어랏! 당신은?!)
토마스도 그제야 그녀를 알아보았다. 둘은 그렇게 다시 본다이 비치에서 시공간이 겹치는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둘은 한 동안 멍하게 서로를 쳐다봤다. 서로를 알아챈 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건 초면에 서로를 너무 몰라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생긴 현상이었다. 표면적인 현상이 같아도 그 내면의 상태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제대로 된 만남도 대화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상대였지만 꿈속에서 너무도 오랜 시간 지켜봐 왔다. 아니 꿈 속이라 그것을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 어쨌든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서로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를 뿐.
일 년 전 새해 첫날의 폭죽과 불꽃이 터지는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보이는 곳에서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난 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때 서로의 이름만 알려주고 서로 각기 다른 방향의 인파에 휩쓸려 멀어졌다. 둘은 꿈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수도 없이 들은 것 같지만 그건 서로가 모르는 언어의 이름이었다. 그날 서로는 서로에게 이곳 영어권이라는 제3의 세계의 언어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서로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지만 자신이 꿈속에서 본 상대의 모습과 꿈속에서 벌어진 장면들이 모두 사실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의 꿈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대가 정말 진실인지 알고 싶었다. 이제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것을 하나씩 확인해 볼 수 있다.
서로는 무엇부터 확인해야 할지 고민이다. 아는 게 많아도 문제다. 마리가 꿈속에서 본 토마스의 모습과 토마스가 꿈속에서 본 마리의 모습을 공유한 적이 없다. 상대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만 상대에 대해 너무 잘 알 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인지 모를 때는 도대체 무슨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둘은 말없이 서로를 그렇게 한참 동안 쳐다만 보고 있었다.
“Are you a Chinese?”(당신은 중국인이죠?)
“No, I’m a Taiwanese”(아뇨, 전 대만 사람입니다)
‘아~ 대만이었구나’
마리는 토마스를 꿈속에서 본 곳은 중국인지 대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리는 대만이 그저 한국의 제주도처럼 떨어져 있는 섬 인 줄로만 알았다. 어차피 쓰는 언어도 같지 않은가. 물론 그들은 다른 점을 느끼지만 마리에게는 그냥 똑같은 중국어일 뿐이다. 두 나라도 한국처럼 언어와 역사가 같은 민족이 둘로 나눠진 또 하나의 분단국가였다. 마리가 수많은 방언을 가진 중국어를 구분할 리 만무했다. 그냥 모두가 하나의 중국인인 줄 알았다.
“You must be a Korean, right?” (당신은 분명 한국인이죠?)
“Yes, I am (네)”
“어랏?~ 근데 내 플루트가 어디로 갔지?”
그때 마리는 자신이 매고 있던 플루트 필통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What are you looking for?” (뭘 찾는 거예요?)
“My flute!? Where is my flute case. It’s in the bamboo stick” (내 플루트!? 내 플루트 케이스 못 봤어요? 대나무 통에 들어있는)
“Hey~ Look at there, it’s in the sea” (헤이! 저기 봐요! 바다에.)
그때 군중 속에 있던 한 사람이 바다에 떠 있는 대나무 필통을 발견하고는 외쳤다. 그리고 어느새 토마스는 다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파도에 밀려 멀어져 가는 필통을 향해 빠르게 헤엄쳐 갔고 간신히 필통을 낚아챘다.
“Olleh~ 짝짝짝”
“Wow~ 짝짝짝”
그때 또 한 번 군중의 박수와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토마스는 다시 파도를 헤치고 해변으로 헤엄쳐왔다. 높은 파도에 그의 모습이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할 때마다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물 밖으로 나와서 필통을 마리에게 건네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우욱~”
이번엔 토마스가 바닷물을 토해냈다. 그도 본다이 비치의 거센 파도에 짠물을 들이켰던 모양이었다. 마리는 그가 수영을 잘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꿈속에서 그가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으로 확인한 그의 수영실력을 보고 그녀는 자신의 꿈속에 나타난 그의 모습이 완전히 허상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곳 본다이 비치(Bondi Beach)는 수영을 하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고 거친 곳이었다. 이곳은 서퍼(Surfer)들의 천국이지 수윔어(Swimmer)에게는 지옥이었다. 이번엔 마리가 일어나서 누워있는 토마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Are you Ok?” (괜찮아요?)
“헉헉헉”
이번에는 마리가 그에게 물었다. 토마스는 눈을 감고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It’s your turn!”(이번엔 당신 차례예요!)
“Kiss him!” (키스해)
“Yes, Kiss Kiss Kiss”
“Yes do it like he did.”
“키스해 키스해!”
“キス して!” (키스해!)
“亲我一下!” (키스해!)
“Embrassez-moi!” (키스해!)
“Küss mich!” (키스해!)
“Hôn em đi!” (키스해!)
“จูบฉันที!” (키스해!)
“¡Beso!” (키스해!)
그렇게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언어가 한 단어를 외치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모두 달랐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는 하나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순간 마리는 왜 자신의 입 주변이 그렇게 따가웠는지 이해가 되었다. 마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토마스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토마스의 감긴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토마스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아니 뜨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뽀뽀삐뽀삐뽀”
그때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현장에 도착했다. 구급요원들이 차에서 뛰어나오면서 군중 사이를 헤집고 둘에게 다가왔다. 구급요원은 물에 흠뻑 젖어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토마스에게 다가가 응급처치를 하려고 했다. 군중들의 실망 섞인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키스신 장면에선 꼭 훼방꾼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드라마는 그래야 한다. 그것이 시청자를 애태우는 고전적인 기법이다.
군중들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아니 업그레이드 버전인 [잠자는 해변의 왕자]로 바뀐 뉴에이지 동화 속의 키스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버리자 한숨을 쉬며 그 자리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영문을 모르는 구급요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역력했다.
“It’s not me, this girl!” (내가 아니고 이 여자예요)
그때 토마스가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며 마리를 가리켰다. 그제야 구급요원들은 마리의 상태를 살폈다. 마리의 새빨간 얼굴과 입가에 묻은 침과 구토 자국을 확인한 구급요원들은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음 확신하고 서둘러 그녀를 구급차에 태우려 했다.
“呀~托马斯! 你这混蛋,在这干嘛?不工作啊?”(야! 토마스 이 개자식! 너 여기서 일 안 하고 뭐 하고 있어?)
“哦,对不起 组将”(어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때 토마스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나 군중을 헤집고 근처에 공사 중인 건물 현장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마리는 그렇게 또다시 멀리 사라져 가는 토마스를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그가 건져준 물에 젖은 플루트 필통을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꿈속에서만 지켜보던 남자를 새로운 세상에 와서 우연처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또다시 나타난 그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플루트까지 건져준 이 믿기 힘든 두 번째 우연은 이제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인연이 또 기약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도 두 번째도 모두 인파 속에 둘러싸여 만나고 헤어졌다. 이것도 우연인가?
꿈속에서 둘은 분명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 머물고 있었지만 두 번의 만남은 같은 공간과 시간이었다. 물결치는 두 가지의 실타래가 만나고 멀어지는 것처럼 둘의 시공간은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 실타래가 엮여가는 듯했다.
그리고 마리는 분명 또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 같은 믿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둘의 관계는 그렇게 실타래가 엮이듯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