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기호학 2

세잔이 '그린' 사과를 보다.

by 수지리

19세기 중반, 사진의 등장은 회화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되묻게 만들었다. 사실적인 재현은 더 이상 회화만의 고유 영역이 아니었고, 사진이 담아내는 생생한 사실적인 재현은 결국 회화는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사진기의 발명만큼이나 혁신적인 스마트폰의 발명을 경험하고 자란 세대의 작가로서, 아직도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유효하다. 아마 동시대 모든 작가들이 느끼는 문제의식일 듯하다.


폴 세잔은 사진의 등장과 함께 회화를 재정의하는 실험을 시작하게 된다. 투박한 듯 과감하게 그려내려 간 그의 사과 정물화 연작들을 보면 그 실험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눈앞에 놓인 정물로서의 사과를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저 사과가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에 집중했다. 이는 더 나아가 ‘보는 행위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연결되고, '보는 자의 의식이 어떻게 시각화될 수 있는가’의 질문에까지 이어졌다.

세잔의 사과는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화면 안의 사과들은 안정된 구도가 아니라 어느 한쪽이 기울어져 있거나, 크기와 배치가 균형에 어긋나 있으며, 과학적인 원근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시점을 통해 바라본 낯선 구도다. 이는 결코 세잔이 원근법을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구도 잡는 법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각이 사물을 바라볼 때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반영이다. 사람의 눈은 대상을 고정된 시점에서 단일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시선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매 순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눈앞에 있는 사물과 그 주변의 공기는 변한다.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에 화가들은 사실적인 재현을 위해서 하나의 고정된 시선으로 대상을 포착하였고, 그 포착한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그 재현 과정에는 '포착'과 '재현'이 주를 이루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인간의 눈이 지니는 주관적인 관점과 해석은 회화에서 배제되었다. 세잔은 ‘보는 눈’의 내부 조건을 회화 안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그림을 단지 대상을 재현하는 창이 아니라, 대상이 '보는 눈'에 의해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접근은 카메라의 렌즈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카메라는 카메라 앞에 놓인 외부 세계의 물리적 정보를 포착하는 도구이지만, 인간의 눈은 감정, 기억, 문화적 맥락, 심리적 반응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해석의 매개다.

세잔은 르네상스 이후 지속되어 온 단일 시점, 소실점 존재하는 고정된 원근법, 선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구성 모두를 해체하고, 색의 덩어리와 면의 대비를 통해 대상의 부피와 공간감을 새롭게 구성한다. 자칫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이런 새로운 시도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형태, 명암과 원근법으로 구성된 시각적 입체감을 넘어서, 감각을 통해 인지되는 사물의 속성과 깊이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 점에서 세잔은 회화를 통해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화가이다. 못생기고 투박한 사과는 아름답지 않은 모습에서 더 아름다웠다.

Paul_Cézanne_-_The_Basket_of_Apples_-_1926.252_-_Art_Institute_of_Chicago.jpg The Basket of Apples, Paul Cézanne, 1893,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세잔의 그림 속 사과는 단지 시선의 대상이 아니다. 세잔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과는 유혹적이고 관능적인 사과가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소박하고 일상적인 과일이다. 그런 일상의 사과를 여러 개씩 담아 수북하게 그려낸다. 사람은 다양한 결핍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중에서도 식욕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며, 배고픔이라는 명확한 결핍이 있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인 음식이 존재하며, 그 대상을 섭취함으로써 결핍은 해소된다. 욕구는 대상과 충족 사이에 비교적 일대일의 대응 관계가 성립한다. 욕구는 일반적으로 충족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완전한 충족이 매우 어렵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던 음식을 먹었다 하더라도, 막상 입에 넣은 음식이 기대했던 맛이 아니면 욕구는 채워지지 않거나, 오히려 실망감이라는 새로운 결핍을 낳는다. 세잔은 회화를 통해 사과라는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감각의 구조와 인식의 움직임을 이해하려고 했고, 사과를 바라보는 방식과 화가의 감각이 머물렀던 시간을 그린 것이다. 세잔은 회화가 정확함보다 재현의 어긋남을, 완전한 재현보다 재현하려는 인간의 욕구와 관찰의 흔적을 남기는 예술이길 원했다. 결코 사진이 대신할 수 없는 영역, 즉 인간의 감각적 주체성과 지속되는 욕망을 그림에 담아냈다. 그 욕망은 유혹적이거나 관능적이지 않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욕구에서 출발했고, 재현의 욕구와 감각의 결핍 사이에서 끊임없이 파생되는 결핍으로 인해, 충족을 위하지 않은 욕망으로 확장된다. 일상 속 부엌 한편에 있던 사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내, 그 사과를 어떻게 그리고 왜 바라보는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still-life-with-apples-and-oranges.jpg Still Life with Apples and Oranges, Paul Cezanne, 1895,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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