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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Oct 22. 2021

편지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한다. 편지 쓰는 일이 쉬워서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말수가 적었던 나는 말보다는 글이 편했다. 편지는 술술 써지는데 말은 나오지 않고 입안에서만 맴돌다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를 지날 때까지도 나는 친구와 대화할 때 답변 세 가지 중에 어떤 답변을 해야 할까를 망설이느라 대화의 많은 시간을 허비할 때가 많았다. 좋게 말하면 지극히 섬세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할 정도로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나에게 말은 어려운 영역으로 자리매김했고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핸디캡이 친구 사귀는데 장애물이 될 거라는 우려를 안고 살았다. 이런 나를 이해해줄 수 없다면 나의 친구 자격이 없는 거라고 속마음으로 늘 생각했지만, 그런 친구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까 봐 불안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 다행히도 내게는 늘 친구가 있었다.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교실 밖 복도에 키 순으로 정렬하게 했고 순서대로 키 번호를 호명하며 교실의 앞자리부터 차례대로 자리에 앉게 했다. 그때 처음으로 짝이 되었던 친구는 내 앞에서 있던 홀수 번호의 아이였고 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친해지게 되었다. 뼛속까지 완전히 나와 정반대인 그 친구는 말을 잘했고 유머러스했으며 명랑 쾌활함을 늘 겸비하고 있는 아이였다. 이점이 바로 우리가 짝이 되지 않았다면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거라는 커다란 근거였다.

그 친구는 나의 말수 없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거 같았다. 말은 자신이 하면 됨으로 너는 들어만 줄래? 하는 거 같았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 친구는 전날 하교 후에 일어났던 온갖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를 나와 더불어 뒤 자리에 앉은 친구들에게 풀어놓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내가 좀 늦기라도 하면 멀리서부터 나를 반겼다. 나는 말수가 적은 대신 웃음이 많았으므로 친구의 얘기에 늘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고 친구도 이런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았다.


다른 한 친구가 있었다.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 같이 걷던 친구는 "왜 말이 없냐?"라고 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던 나는 미소만 지어 보였고 친구는 말 좀 하라고 여러 번 나를 다그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 길을 걷자니 어색하기도 하고 심심했던 모양이다. 지금의 나라면 "그러면 네가 말을 좀 해 줄래?"라고 말했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말 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난 난처한 표정으로 그 긴 길을 걸어내었다.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짝에게 더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짝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품고 다니던 말수가 없는 나를 이해해주는 바로 그런 친구였다. 쉬는 시간이 되면 가만히 앉아 있는 나와는 정반대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을 치고 깔깔 거리는 친구와 있다 보면 나까지 발랄해지는 기분이었고 마음속이 흐뭇해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린 다시 같은 반이 되었고 그 해 봄 엄마가 돌아가셨다.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 다수가 우리 집에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짝이었던 친구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친구는 다른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부모 잃은 슬픔을 공감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멀리서 울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나 대신 울어주는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올해 봄, 친구의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전해 듣고 나는 장례식장으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는 방금 입관식을 하고 나서인지 눈물이 난다며 다시금 맺히곤 하는 눈물방울을 손으로 애써 지우려 하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친구를 보자 엄마가 돌아가실 때 울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울고 싶으면 울어."라고 말하며 나는 친구를 품에 안고 등을 오래도록 쓸어 주었다. 친구는 내 어깨에 기대어 울먹이며 "그때 너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나더라. 어른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넌 어렸었잖아. 얼마나 힘들었어?"라고 말했다. 일순, 나는 울컥하며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위로를 하러 온 내가 도리어 위로를 받다니.' 그때 든 생각이었다. 나는 그 순간 친구에게 삼십 년 전의 아픔을 진정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 친구와 나는 다른 고등학교에 배정받아 우리는 자주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친구에게 안부와 근황을 묻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친구도 편지 쓰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고 매번 늦지 않게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학교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아이처럼 오히려 쾌활하게 꾸민 얼굴로 연기하며 지냈고 힘든 일들은 모두 편지에 담아내게 되었다. 말로 하면 참 어려운 말들도 편지에서는 가능해지는 신기한 마법이 일어났다 - 힘든 얘기를 꺼내면 친구까지 우울해할까 봐 말로는 꺼내지 못하던 말들이 편지에서는 가능해졌다.

그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지만, 친구는 공감 능력이 광활한 우주 정도는 되는 사람이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일도 어떻게 겪은 일처럼 공감할 수 있는지 의아해서 성인이 되어 물어본 적도 있는데 친구는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라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백 통도 넘게 쌓여 갔고 그 속에는 내 수많은 불행의 사연도 차곡차곡 더해짐으로써 나의 불행의 짊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음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위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길은

서로를 위하여 눈물 흘려주는 것


거기에 작은 것,

따뜻한 포옹과

토닥이는 손길과

포근한 어깨


겪어보니 이제야 알겠다는 말,

늦은 말이어도 괜찮다


그때에 너는

놀람으로 가득한 얼굴을 파묻고

오래,

울어 주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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