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민 Oct 22. 2021

도시락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두 살 터울 위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해 버리자 그나마 오빠를 위해 챙겼던 도시락을 기꺼이 -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기에 - 포기해 버린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는 매일 유서를 써놓고 제발 엄마 곁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린 후에야 잠이 드는 아이였다. 일기장에는 점점 유서가 불어났고, 유서는 점점 형식이라는 것을 갖추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돈벌이를 하면서부터는 현재 갖고 있는 재산을 분배하는 부분도 잊지 않았다. 나는 내가 죽고 나면 가장 먼저 언니가 나의 유서를 발견하길 원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언니와 오빠에게 나의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겠노라는 부분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누구에게는 얼마, 누구에게는 얼마, 이런 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적은 금액을 나누려고 했던 시도가 우습게만 느껴진다. 또 언니는 그 적은 금액을 일일이 전달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을 것이며 실제로 유산이 잘 전달될 수는 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면 그 당시의 내가 참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서 코웃음을 치며 웃게 되지만 그 당시의 나는 굉장히 진지했고 유서에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죽은 사람 소원은 당연히 들어줄 것이라는 인지상정이 그렇게 유서의 세부사항을 결정하게 했고 비장함마저 지니게 했던 것 같다. 떠나가면서도 고마운 이들을 위해 나의 전재산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었던 마음은 어쩌면 내가 그토록 놓고 싶지 않았던 삶에 대한 애착의 표현일 수도 있었고 실낱같은 희망의 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의 내용으로 유추해보면 나의 유서는 성인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의 삶은 꽤 오랫동안 녹록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말의 해석 속에는 한 끼만 먹지 않았다는 의미만 들어있지만, 구체적으로 나는 아침도 먹지 않았으므로 두 끼를 먹지 않은 셈이었다. 그리고 야간 자율 학습을 하면 저녁은 컵라면 하나로 때우기 일쑤였다. 거의 매일을 컵라면 한 끼로 살아간 셈이었다. 딱히 배고프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애써서 끼니를 챙겨 먹었겠지만, 나의 목표는 죽는 것이었고 밥을 먹지 않는 일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이었으니 내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매일 유서를 쓰고 어떻게 하면 편안히 눈 감을 수 있을까만을 온종일 연구하며 지내는 사람에게 밥이 중요할 리 없지 않은가. 난 간신히 연명할 정도의 식사만을 한 채 편안히 죽을 방도만을 연구했다. 미국처럼 총기 사용이 가능한 국가라면 쉽게 총이라는 무기를 떠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인터넷도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에 죽을 방도를 찾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수면제를 구하는 일도 마땅치 않았다. 목숨을 단번에 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시도했다가 불구가 되거나 다시 살아나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 생은 차라리 지금 이렇게 사는 것보다 더 비참할 것이라 예상되었다.


나는 죽음에 대해 진지했다. 생과 사. 인간의 근원에 대한 질문들.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차피 인간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존재라면 지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이 있다면 왜 행복만이 가득한 세상을 설계할 수는 없었을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신은 왜 불행한 자들을 내버려 두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이들은 행복한 삶을 부여받고 행복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불행한 삶을 부여받고 힘겹게 견디며 살아가는가?

친구들이 아이돌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열광할 때 나는 마치 외딴섬에 세워진 연구소에서 '생과 사'에 대한 첫 프로젝트에 참여한 신입 연구원처럼 굴었다. 나는 그들의 관심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불어 나는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도시를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운전을 험하게 하는 기사님의 버스가,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도서관에 가서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런 모습을 내 뒷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유심히 관찰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나를 조용한 곳으로 부르더니 왜 도시락을 싸오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 그때는 학교 급식이 없던 시대였다 - 난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이런 얘기 따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당당한 표정으로 "엄마가 돌아가셔서 도시락을 싸줄 사람이 없어"라고 말해 버렸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 되도록 떨지 않고 자연스럽고 덤덤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시절 나는 동정의 눈초리가 참을 수 없이 싫었으므로 나는 정말 괜찮다는 말을 목소리에 담았어야 했던 것이다. 너는 질문을 했고 나는 그에 맞는 답변을 했으니 이제 됐지?, 하는 표정으로 나는 자리를 떴다. 그렇게 깔끔하게 대답해 줬으니 동정은 절대 거부한다는 의사 전달은 피력한 것이었고 친구가 내게 꼬치꼬치 더 캐묻지 못할 명쾌한 대답을 해주었으니 - 진실의 말에는 더 대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란 확신으로 나는 뒤돌아 섰던 것이다.


다음 날, 도서관에 있는 나를 찾아온 친구가 따라오라고 당당하게 명령조로 얘기하며 내 손을 꼭 붙잡고 교실로 데려갔을 때, 책상 위에 세 개의 밥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일이 크게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는 내가 그렇게 경고했던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앞뒤의 책상 두 개를 붙여서 만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온 통에 담긴 하얀 밥이 세 개가 있었고 그 하나의 주인인 친구의 친구가 해맑은 표정을 하고서 앉은 채로 서 있는 내 시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친구는 나를 빈 의자에 앉히고는 손에 숟가락을 쥐어 주었다. "밥 먹자. 엄마한테 얘기해서 하나 더 싸 달라고 했어",라고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뿌옇게 시야가 가려진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난 너무나 창피해서 달아나고 싶었는데 일어서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져 버릴 것 같았고 목이 메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행동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 내가 화를 내거나 나가버리거나 하면 오히려 다른 아이들 눈에 띄게 되는 것 - 주목받는 것 - 이 두려웠다. 조용히 내가 밥을 먹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밥을 먹는 행동을 유지했고 어떤 이상한 행동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친구를 보면 그 행동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난 먼 창문만을 응시했고 빨리 밥이 줄어들기만을 바랬다. 이 순간만을 넘기고 나면 나는 다시는 이런 순간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친구의 도시락은 계속 배달되어 왔다. 난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곧바로 자리를 떠서 어디론가 숨곤 했는데 그 친구는 계속 나를 찾아내었다. 친구는 자신이 옳은 일이라고 마음먹으면 일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목표를 꼭 이루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이었고 힘도 굉장히 세서 한번 들키면 나는 그 손아귀 힘에 잡혀 끌려 오고야 말았다. 끊질긴 도망자와 추적자의 관계가 된 애증의 도시락 배달은 여러 차례 이어지다가 끊어지다가를 반복하며 어느 정도 안착하는데 이르렀다. 내가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너의 도시락이 창피하고 불편하다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집요했던 친구는 그런 사정을 읽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최악으로 생각하는 동정받는 감정을 입 밖에 더더욱 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순순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만이 가장 조용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점점 깨달아 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한 번씩 우리 테이블을 눈으로 훑고 지나가면 난 제 발 저린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피할 수 없다면 빨리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으로 나는 위기를 넘기고 싶었다.


성인이 되어 그 친구를 다시 만난 어느 날, 나는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친구도 성인이 된 다음 그 사건에 대한 감정이 방향은 다르지만 나처럼 완전히 달라져 있었나 보았다. 그 얘기를 꺼내자마자 친구는 무안해했고 미안해했다. 그때의 자신은 참으로 나의 감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아니야, 내가 오늘 얘기하는 건 그때 창피했었고 동정받는 거 같아 숨고 싶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때 너의 따뜻한 마음을 왜곡했던 나를 반성한다고 말하려는 거야. 그때는 정말 어려서 그랬었나 봐. 동정이 죽기보다 싫었었는데, 지금은 그때를 생각하면서 고마움을 느껴. 그 시절 너의 집요함이 나를 살린 거야. 제대로 먹지도 않고 비실거리던 나에게 밥이라는 큰 도움을 주었잖아. 한 끼의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때의 나는 몰랐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너한테 많이 고마웠어. 내가 밥 안 먹겠다고 도망 다니고 너의 진심을 고맙게 받지 못하고 창피하게 느꼈던 것도 미안해졌어. 고마워. 정말. 그 시절 밥은 나한테 꼭 필요한 것이었어."

이 날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7월의 눈부신 햇살이 비취던 어느 날이었다.

pixabay.com


이전 01화 해님과 바람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