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by 희노가

한 번은 밤 9시가 좀 넘은 시간에 갑자기 정전이 된 날이 있었다.


그날은 사과농장에서 사과를 따는 체험을 하고 온 날이라 몹시 피곤해서, 잠자리에 들 준비를 일찍 하고 있었다. 그런데 씻기 전 아이가 나에게 "엄마, 갑자기 정전이라도 되면 어쩌지?"라고 말했는데, 정말로 정전이 되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뭐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면 캐나다 일반 이층높이의 주택의 1층이다. 아니다. 1층이라고 하기엔 계단을 몇 개 내려와야 하니까 정확히 말하면 '백 야드'와 연결된 반지하에 가까운 곳이다. 아이와 둘이 생활하기에 알맞은 크기에 테라스로 바로 나갈 수 있어서 좋고, 동네도 조용하다. 특히 위층에 머무르는 집주인분이 정말 따뜻한 분이라 자주 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다. 타지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큰 인연이고 종종 찻자리도 함께 하면서 삶을 나누고 있다.


어쨌든 정전이 된 순간, 우리의 행동도 정전이 된 듯 잠시 멈췄지만 이내 휴대폰을 더듬더듬 찾아서 플래시를 켜고 나갔다. 이곳만 그런 건지, 다른 곳도 그런 건지 궁금해서다. 그런데 위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1층도 불 다 꺼진 거 맞죠?”

윗집 막내딸아이의 목소리였다. 그 친구는 한국나이로 중학생이지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고, 어른이라고 말을 함부로 놓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는 계속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다.

“네.. 다 꺼졌어요! 이거 정전인가요?” 하고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정말 아주 가~끔 이러는데 무슨 일인 지 모르겠어요.”

“엄마는 어디 계세요?”

”엄마 지금 토론토에서 오고 계시는데 좀 늦으신데요..”


저 어린 친구도 혼자라 무섭지 않나, 괜찮나 그런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우리 집 꼬맹이가 내 옆에서 옷을 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렇구나. 곧 복구되겠죠? 기다려 봐야겠네요.”하고 1층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전까지 평온했던 우리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밤 9시가 넘었을 뿐인데 온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대도시와 달리, 작은 도시의 밤은 유난히 더 짙게 느껴진다. 플래시를 켜놓은 휴대폰 배터리는 반 정도 남아 있었지만 왠지 불안했다. 그저 전기가 나간 것뿐인데 밀려오는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분명 나 어릴 때에도 정전이 가끔 되었던 것 같은데, 성인이 된 후로는 겪은 적이 없던 것 같다. 아이에게는 티를 내지 않고 오늘은 일찍 자자고 하면서 침대로 데리고 갔다.

일단 전기가 들어오는 코드를 생각나는 대로 다 뽑아두고, 다시 전기가 들어오면 거실불만 켜지게끔 해두고 누웠다. 불안한 마음을 어둠에 감추고, 아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혼자 있을 때 정전이 됐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며 서로의 존재에 감사했다.


그렇게 꼭 끌어안고 있다가 아이는 잠이 들었고, 나 역시 선잠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냉동실에 있는 음식이 걱정이 되어 확인하느라 몇 십분 간격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했던 것 같다. 거의 12시가 된 무렵, 팟! 하고 전기가 들어왔다.

'휴~ 우리는 무사해!'


아이는 이미 쿨쿨 꿈나라로 간 지 오래지만, 나는 그 뒤로 일어나서 바쁘게 돌아다녔다. 냉장고 안의 음식을 확인하고 집안 곳곳을 확인했다. 그렇다 한들 2시간 정도의 밤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겠는가. 사실 아무런 변화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


만약 한겨울이었다면 히터를 틀 수 없었을 것이고, 씻고 있었다면 낭패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히터를 틀 날도 아니었고, 샤워도 이미 마쳤고, 곧 잠잘 시간이라 일상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모든 불빛이 사라지자 집안이 갑자기 낯선 공간으로 돌변한 그때의 기분은 여운이 남아있었다.


문득 일본에서 지진을 처음 겪었을 때가 떠올랐다.

지진이 잦은 나라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대비가 잘 되어있다. 그러나 지진을 겪어보지 않았던 유학생에게 그 경험은 너무나 낯설었다. 침대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침대를 붙잡고, 지진보다 더 벌벌 떨곤 했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지진으로 문이 뒤틀릴까 봐 문을 열어놓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비상식량이 든 가방을 껴안고 있던 적도 있다.


지진과 정전은 다른 종류의 재난이지만,

낯선 환경에서의 정전은 묘하게 처음 지진을 겪었을 때의 공포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항상 옆에 있다고 여기는 전기가 끊기면, 고작 몇 시간의 일이라도 이렇게 불안하고 불편해진다. 이것이 어쩌면, 너무 문명에 익숙해진 인간의 나약함은 아닐까.

서울에 있을 땐 좀처럼 정전을 겪어보지 않았더라도 손전등이나 초 같은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았고, 가족들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데 자연과 좀 더 가까운 큰 나라에서 정전을 겪으니 당황스러울 뿐만 아니라, 울타리 너머로 짐승이 오면 어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날의 정전은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당연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동안 어둠 속에서 우릴 밝혀주었던 것들, 손전등 기능을 대신해 준 휴대폰, 그 모든 문명의 혜택에 새삼 감사할 수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경험들이 이어지고 있는 이 캐나다 생활과 옆에서 잠든 아이에게도.


낯선 땅에서 겪은 정전은,

내 마음에 조용히 불을 켜준 밤이었다.


"삶은 축제다"

-희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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