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 속의 알레르기
*9월 7일 / 일요일 아침
7시 반에 눈이 떠졌지만 아들과 뒹굴뒹굴하다가 8시쯤 일어났다.
적당히 여유로워서 좋은 주말의 ‘보통의 아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술에 쏙! 쏙! 하고 불편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 한국에서 겪었던 아나필락시스(알레르기 쇼크) 때와 똑같다.
'나 어젯밤에 뭘 먹었지?'
“아들아, 잠깐 엄마 입술 좀 봐봐. 부었어?”
“응? 엇, 엄마 부었다!”
눈이 커지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많이 부었나 보다 하고 거울로 확인하니 정말로 입술이 오리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순간 온몸이 긴장한다. 일단 한국 병원에서 처방받아온 항히스타민제와 스테로이드제를 찾아 털어 넣었다. 목까지 부어 응급실을 다녀온 지 한 달도 안 돼서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믿기지 않는다. 무엇에 반응한 걸까. 닭강정, 족발… 기억을 더듬지만 명확하지 않다.
아, 엊저녁 아이를 주면서 몇 개 집어먹은 '족발 몇 점'이 의심이 간다. (온갖 한방재료가 들어갔을 테니 그럴지도 모른다. 족발집사장님들께는 죄송하지만)
몇 분마다 상태를 확인하며, 런던 시내 응급실 주소를 찾아놓고, 급할 때 연락할 수 있는 지인의 연락처를 메모했다. 분명 몸과 정신은 바짝 긴장한 상태인데도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몸이 차가워진다. 저혈압증세도 있다_나중에 찾아보니 증상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있던 그때,
아이가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T력(현실감각) 만렙'으로 말한다.
“엄마, 아무래도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얼른 옷 갈아입어요.”
순간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아들, 잠깐 기다려봐. 약 먹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지금 엄마 입술 어때?”
“처음보다 더 부었는데, 아직 마스크 쓸 정도는 아니고, 예뻐.”
“무슨 소리야, 그게. 푸흐흐”
긴장은 어이없는 웃음으로 풀리고, 한 시간쯤 지나자 입술은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숨 쉬는 데도 지장이 없다. 눈치가 빠른 아이는 배고프다며 시리얼을 타먹고, 나는 그대로 2시간 정도 깊은 잠에 빠졌다.
이렇게 생애 두 번째 혈관부종은 일단락되었지만 여유로운 주말 아침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소중한 오전은 이미 끝났다.
*10월 3일 / 평일 아침
아침 6시 반,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내려와 스트레칭을 하는데 손이 유난히 부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입술을 확인하니, 거울 속에 '오리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본다.
'꽥, 너 뭐니?' 분명 새롭게 먹은 것도 없는데, 왜 또?
이번에는 어제 갔던 아름다운 공원의 나무들을 의심해 본다. 그리고 공원에서 만난 캐나다구스, 오리들을 떠올린다. 그들을 캐릭터로 만들면 이런 얼굴이 되려나. 혹은 도널드덕을 실사화해놓으면 어떨까. 내 얼굴이지만 도저히 못 봐주겠다.
'이번에도 약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애써 진정하며 비상약을 빨리 삼키고는 도시락을 챙겼다.
이러다가는 아침을 준비하며 얼굴을 계속 확인하는 게 '보통의 아침'의 루틴이 될 것 같다. (그러긴 싫다)
아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내 얼굴을 보곤 이런다.
“엄마 얼굴 또 오리가 됐네? 학교 가는 거 괜찮겠어?"
그 말에 또 피식 웃음이 난다. "응, 차로 가니까 오리얼굴로 그냥 갈 거야. 나 때문에 학교 안 간다는 이야기 하지 말아라" 농담까지 할 여유가 생겼다. 경험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다고,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오리로 변신하더라도 약을 빨리 먹으면 생명에 위협은 없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내내 걸렸다. 사실 공원의 나무들 말고도 감이 오는 것이 있었지만, 아니길 바랐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몇 시간이 지나니 입술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조금 싱겁게 끝났다.
오리 안녕. 다음 달엔 보지 말자.
*11월 6일 /평일 아침
끝난 줄 알았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알았다. '난 지금 오리겠군.' 입술이 땡땡하게 부어오르고, 몸이 간지럽다.
또 알았다. '음식과 나무가 문제가 아니었군.'
캐나다에서만 세 번째로 찾아온 혈관부종은 결국 패턴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첫 번째엔 족발 몇 점을 의심했고, 두 번째엔 그 전날에 다녀온 공원의 나무를 의심했다. 세 번째가 되니 날짜에 힌트가 있었고, 몸이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대.자.연.의.법.칙'
여자들의 몸은 대자연처럼 어떤 주기들이 있는데, 수월하게 지날 때도 있지만 수월하지 않을 때가 더 많고, 이렇게 종종 나처럼 기괴하게 주기를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번엔 오히려 담담하게 '나무가 뭔가 나랑 안 맞았겠지' 했지만 드디어 명확한 원인을 알게 되자, 또 화가 치솟는다.
'이놈의 몸뚱이, 대체 언제까지 이럴래!'
호르몬 약을 오랫동안 복용하고 있는 것도, 가끔 올라오는 두드러기 때문에 먹는 두드러기약도, 혈관부종까지 갈 땐 스테로이드까지. 지긋지긋한 마음이 들어 화가 난 상태로 약을 먹고, 아이를 깨우기 전 잠시 고민했다.
'학교 가지 말까?'
다 싫어진다.
이렇게 못생긴 오리 녀석은 공원에서만 보고 싶다. 거울이 아니라.
아이를 깨우고 가만히 말했다. "엄마 얼굴 어떤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내 낮은 목소리에 눈치를 채고 얼굴을 보더니 말한다.
"오늘은 그래도 부리가 좀 짧은 오리네."
아, 난 아무래도 너의 유머력을 좀 배워야 할 것 같아.
오리건 구스건, 받아들여야겠지. 내 몸이 계속해서 예민해지고 변해가는 걸.
아이를 학교에 잘 데려다주고 와서 약기운인지 뭔지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면 '보통의 아침'에 오리가 출현하고, 또 그다음 잠에서 깨면 오리는 사라져 있다.
<잠자는 숲 속의 오리>인가 알레르기인가...
다행히 오리에게 약이 잘 듣는 것에, 약이 아직 남아 있는 것에 감사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병원 가기'
호르몬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몸과 함께 살아가려면, 내 몸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이 필요하다.
거기에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는 양념으로 '유머'가 있으면 최고겠지.
오리가 출현한 날도, 이제 진짜 '보통의 아침'으로 받아들이자.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책 제목이 하나 떠오른다.
'농담처럼 살아내야 할 하루다'. 정말로.
-희노가
지난 이야기: 수채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다음 이야기: 시나브로 잡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