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사마타와 위빠사나 (2)
- 남방상좌부불교의 명상
사마타·위빠사나 명상의 문제점
이러한 일반적인 설명과는 달리, 사실상 용어의 의미들이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많고,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용어의 정의가 모호해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다. 이런 의미의 혼동과 혼용, 또는 모호한 용어로 인해서 사실 불교명상에 입문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쌓기는 쉽고 재밌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사변적인 용어와 추상적인 단어들로 인해 난감해진다. 이것은 북방대승불교의 선명상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사마타명상의 선정에 대한 설명은 난해하기 그지없다. 사마타명상을 통해 선정을 닦아 이뤄내는 경지를 사선정(四禪定)으로 구분하는데, 아래와 같다.
초선정: 욕계를 떠남으로써 생기는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경지
이선정: 선정으로부터 생기는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경지
삼선정: 희열을 떠나 마음이 안정되어 뛰어난 행복만을 느끼는 경지
사선정: 행복마저도 떠나 평온하여 마음이 청정하고 평등한 경지
이 외에도 선정의 경지에 대한 설명은 욕계·색계·무색계의 33천에 대한 설명과 함께 무소유처정이라던가 비상비비상처정등의 경지도 존재한다.
문제는 이런 세분화된 경지를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위의 정의를 살펴보면, 과연 각 선정의 단계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단어를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깨달은 사람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설명해주면 좋겠지만, 대부분 경전이나 주석서 등에 의지해서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 설명하려고 하다 보면, 권위를 가진 책들, 경전과 주석서 등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양심이 있는 사람은 경전에 의지해서 말의 권위를 가지려고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호한 정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스스로 과대평가해서 미쳐가는 경우도 많다.
위빠사나명상의 사념처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념처경’을 살펴보면, 사념처의 네 가지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을 말한다. 사념처 수행은 이들에 대한 마음지킴과 지속적인 관찰을 구체적인 방법으로 실행한다.
신념처(身念處)는 몸에 대해, 이 몸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부정한 것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애착할 만한 대상이 못 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념처(受念處)는 느낌에 대해, 음욕이나 재물같이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즐거운 것은 그것이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념처(心念處)는 마음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념처(法念處)는 법에 대해, 모든 만유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니, 실체가 없고 나에게 속한 모든 건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통찰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도 의구심이 생긴다. 하지만, 그 전에 사념처의 각 념처들의 개념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다. 비록 사념처가 니까야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이렇게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수행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또한, 지금 시대의 명상은 붓다께서 고통과 쾌락을 여읜 중도에서 깨달았다고 하며 고행을 포함한 수행을 등한시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면서 붓다 시절의 선정에 해당하는 명상만 하고 있다.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선정의 한계는 선정에서 나오면 다시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행에 대한 대체로 위빠사나라는 통찰명상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고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마타(집중명상)와 위빠사나(통찰명상)를 통해 선정과 지혜를 증득하고 깨달음으로 갈 수 있다고 남방불교는 주장한다.
그런데 붓다께서 수행하신 방법에 위빠사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마타에 해당하는 수행은 했지만, 위빠사나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명상 수행을 깊게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마타라는 선정 수행은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관찰이 뒤따른다. 일어나는 생각을 그대로 둔 채,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사마타이고, 일어나는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 위빠사나인 것이다. 사실상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따로 떨어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마타·위빠사나 명상의 장점
첫째, 논리적이고 세부적이다. 명상의 구조를 불교의 기본 교리에 근거해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이 지점은 현대인이 명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역사적인 필연성이 아닌, 서구인들에게 더 쉽게 이해되고 전해졌을 것이다.
둘째, 집중을 통한 고요함과 통찰을 통한 지혜 습득이다. 이것은 지관쌍수(止觀雙修)라고 하여 북방불교에서도 일부 행해졌다. 집중명상을 통해 고요함을 얻고, 그 고요함을 기반으로, 통찰하여 지혜를 얻어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셋째, 사마타명상의 경우, 상대적으로 쉽게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수식관은 현대인에게 짧은 시간에 고요함을 찾을 수 있도록 쉬운 설명과 단순한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마타·위빠사나 명상의 단점
첫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초기불교가 아닌 부파불교의 일파에서 나온 명상법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붓다 당시의 수행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수행자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미얀마의 스님이 20세기 초에 새롭게 만든 수행법이다. 실질적인 수행을 통한, 깊은 체험 없이 만들어진 수행법인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 구성된다. 실질적인 수행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명상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 그래서, 수행에 적용할 때, 이론과의 괴리가 존재한다. 실질적으로 관찰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모호하다. 이론적으로는 무상·고·무아라는 본성을 통찰할 수 있다고 하지만, 통찰을 통해 어떻게 본성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사마타·위빠사나 명상의 한계
사마타명상을 통해 선정에 들어가면 표면의식의 고요함이 가능할 뿐이고, 그 이상의 심층의식에는 들어가지질 않는다. 또한, 위빠사나명상은 통찰 혹은 관찰의 한계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층의식의 관찰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이유는 관찰자가 표면의식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심수심법의 사념처는 피관찰 대상이 되고, 그것을 관찰하는 자가 관찰자로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관찰자 역시 표면의식의 자아에 불과할 뿐이다. 제대로 통찰을 하려면 표면의식 아래에 있는 심층의식(잠재의식과 무의식)을 통찰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관찰자’에 대한 의심 없이, 절대적 가치의 관찰자를 상정하여 그것을 진아(眞我)로 보는 것이다. 공(空)사상의 무아(無我)설에 의하면, 진아 역시 거짓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찰 대상은 가짜 나 즉, 가아(假我) 혹은 개아(個我)가 되고, 관찰자는 진짜 나 즉, 진아(眞我)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혹 진아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 진아는 가아, 가짜 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