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章
90년대 중반 에버랜드로 이름이 바뀌기 전인 ‘용인자연농원’ 시절에도, 연인들이면 꼭 한 번 가봐야 하는 장소였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에버랜드는 도시에서는 좀처럼 가질 수 없는 느낌을 준다. 특히 ‘장미축제’ 기간에의 야간 개장은 화사하고 선명한 한낮의 봄과는 결이 다른 나른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점들이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 커플들의 마음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계기를 주기도 한다. 과거에도 이런 이유로 연인들의 ‘성지’였다.
“언제 한 번 용인자연농원 가자. 요즘에 가면 좋을 거야.”
“흐흐, 언제 적 용인자연농원이야? 요즘은 에버랜드라고 해.”
“아는데, 입에 붙질 않네. 내가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가 봐.”
“응, 그래. 난 조카들이랑 밖에 안 가봤는데~.”
“에이, 설마~.”
5월의 어느날, 우리는 에버랜드로 향했다. 차를 주차하고 순환버스를 타고 입구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대략 오후 3시 정도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많았다. 입구에 도착하니 휴대폰 QR코드의 입장권을 확인했다. 입구를 통과하고 나자, 테마파크의 전경이 나타났고, 새로움에 대한 어색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와의 동행 때문인지 묘한 설렘이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니, 그녀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진짜 오랜만에 오네.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어.”
“난 조카들이랑 와봤으니 10년 정도 된 것 같아.”
우리는 입구에 있던 팸플릿 지도를 들고 전체적인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편했다. 먼저 사파리로 향했다. 꽤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그렇게 줄을 기다리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 보니 금세 순서가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1시간가량 기다렸을 텐데, 그리 오래 기다린 것 같지 않다. 그때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난 상태였던 것 같다.
사파리를 둘러본 뒤, 장미축제가 벌어지는 장미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미 정원에 도착하니, 그녀가 뛸 듯이 좋아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장미를 보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잠시 구경을 한 뒤, 저녁을 하기로 했다. ‘낮의 장미’보다 ‘밤의 장미’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정원 전체에 조명이 밝아져서인지, 낮과 밤의 경계를 더욱 아련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제까지 우리는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여기저기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사진을 찍을 타이밍이 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진을 같이 찍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나이 50을 넘어가는 우리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과는 달리 우리 세대에게 사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시대의 사진은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고, 현상소에 맡겨서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인화한다. 24장이 담긴 필름 사진은 필름을 다 찍을 때까지 현상할 수 없다. 그렇다고 비싼 필름을 아무렇게나 찍을 수도 없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기다림이었고, 쉽게 지울 수 없는 추억이었다.
그렇게 밤의 장미 정원을 이리저리 걷다 보니, 젊은 커플들이 사진 찍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이게 뭐라고 선뜻 사진을 찍자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젊은 커플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죄송한데, 저희 사진을 좀 찍어주실래요?”
“아~! 네, 그러죠. 그런데 저희가 사진을 잘 못 찍어요.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제가 구도를 잡아드릴 테니까, 고대로 찍어만 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의 구도가 훌륭했다. 그리고 그런 젊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자, 젊은 친구가 말했다.
“두 분 사진 찍어드릴까요?”
그 말에 우리 둘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좋아요!!!
”
젊은 커플은 우리를 보고 나서, 서로 눈을 맞추며 눈웃음을 지었고, 우리는 스마트폰을 내주며 아직은 자연스러운 듯 쑥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그 젊은 커플이 찍은 구도 그대로 우리는 3장의 사진을 찍었고, 그것이 그날의 사진 전부였다. 그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첫 사진이 탄생했고, 그 3장 중의 1장은 우리의 첫 사진이자 ‘인생 사진’이 되었다.
사진을 찍은 뒤 우리는 몇 개의 놀이기구를 탔다. 무서운 놀이기구들을 우리는 탈 수 없었다. 누군가 타지 못하도록 막은 게 아니라, 우리 나이가 그런 것들을 탈 수 있을 정도로 젊지 않았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나 바이킹 같은 놀이기구를 억지로 탈 수는 있겠지만, 겁이 난다기보다는 타고 내렸을 때 어지러움이 걱정되는 나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이들이 타는 짧고 과격하지 않은 놀이기구를 몇 개 탔다.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놀이기구를 탄 뒤, 우리는 퍼레이드를 기다리기 위해 2층 카페 겸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우연찮게 잡은 자리였지만, 알고 보니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를 볼 수 있는 명당 자리였다. 이윽고 퍼레이드가 시작되었고, 갖은 조명과 치장으로 장식된 퍼레이드 자동차들이 지나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나가는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얼굴은 소녀의 호기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신난 표정을 한, 천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우리 이제 여기 매년 오자!”
“응, 그래. 그러자.”
내 대답을 듣고선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려 퍼레이드에 집중했다. 엉겁결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매년’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고선, 작은 한숨을 쉬며 퍼레이드에 눈길을 돌렸다.
지금도 가끔 이날 아내가 한 이 말을 가지고 놀리곤 한다. 당신이 먼저 프러포즈했다고.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자,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요란한 음악과 함께 테마파크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졌고, 하늘에 불꽃이 수놓아졌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한참 불꽃이 하늘에 펼쳐질 무렵,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포개어왔다. 완전히 허를 찌르는 기습 뽀뽀였다. 그리곤 이내 부끄러운 듯 입술을 떼고 고개를 돌려 불꽃놀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에서 소녀를 보았고, 난 어느새 소년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