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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턴 에디씨 May 03. 2022

잔기침

기획자의 회사 정리기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3월 31일 목요일.


10:34 <사무실> 책상 위 전화기 화면

등록되지 않았습니다


11:00 <사무실 뒷문> 회사 대표님

"매니저님 점심 먹고 싶은 걸로 시켜주세요. 그냥 매니저님 드시고 싶은 걸로. 먼지 알쥬?"



12:59 <사무실 안> 동료 매니저님

"매니저님, 저 열나는 거 같은데 코로나 아니겠죠?

혹시 체온계 어딨어요? 아 진짜 그동안 멀쩡하다가 걸리면 너무 억울할 거 같아요. 저 자가 키트 좀 사 가지고 올게요."


"아, 그리고 까먹을까 봐 얘기하는데, 냉장고 안에 선물 있으니까 잊지 말고 꼭 가져가세요."


13:30 <중정 앞> 미화 선생님

"오늘 (시설관리) 소장님 안 나오셨어요. 인수받는 회사랑 인수인계하면서 그쪽에서 뭐 말도 안 되게 이야기했나 봐요."

"저도 여기서 계속 일할 지 모르겠어요. 계속할 수는 있게끔은 해주셨는데. 고민중이예요. 잘 맞을 지. 미화 반장님은 그만두신대요. 나이도 있으시고 좀 쉬고 싶으시다고."



13:50 <사무실 복도> 팀장님

"빈, 나 진짜 울 뻔했잖아. 몇 시간 걸려서 외장하드로 파일 다 옮겼는데 갑자기 인식이 안 되는 거야. 진짜 벙쪄가지고. 복구 맡기면 된다고 하는데,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다시 해야지 뭐."



16:55 <정리 중인 사무실 안> 경영지원 팀장님

"여러분 곧 다섯 시에 사무실 프린터 반납하니까 출력할 거 있으면 얼른 하세요. 그다음에 출력해달라고 하면 진짜 나 화낼 거야."



17:30 <식물 공간> 공간 가드너

"매니저님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저기, 우리 사진 하나 남길까요? 여기 배경으로 남길 수 있는 건 마지막이잖아요. 여기 뒤에 보드 보이게 같이 찍어요."


"저기 무지개 보이세요? 빨리 소원 비세요. 저는 여기가 물에 잠기게 해달라고 했어요.

잔디마당이 쫙 물에 잠겼다가 쫙 빠지면, 잔디가 정말 잘 자라거든요. 아 진짜로요."



19:00,  <사무실 라운지> 컨소시엄 파트너 대표

"여러분 정말 미안합니다. 뭐 미안하다는 이야기로는 어떤 위로도 되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미안합니다.

재수 없게 제가 걸려가지고. 근처에 오시면 정말 편하게,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제가 여러분들 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 같은 공연 기획만 해오던 회사가 이렇게 큰 공간을 어떻게 운영해보겠어요. 여러분들을 만나서 이제는 어디 가서라도 이런 거 해봤다 할 수도 있게 됐고요. 그동안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우고 얻어갑니다."


"근데 혹시 아직 제가 안아주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19:10 <핸드폰 알람>

[사업기획2팀] 아직 퇴근하지 않으셨습니다.



20:00 <회식 자리> 동료 매니저

"실장님은 아직이래요? 이제 마지막 날인데 빨리 마무리하고 오시라고 해요."



20:15 <회식 자리>

그래도 마무리는 우리 방식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영상을 준비했어요. 인터뷰하신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여기 사람들과 공간을 조명하는 인터뷰 영상을 준비했어요. 근데 최종본은 아니에요. 거의 최종본? 느낌 알쥬?


"와 매니저님 영상 찍는다고 너무 꾸미고 나온 거 아니에요?"

"근데 여기는 어디예요?"

"아~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다목적홀이잖아요."

"쨌든 매니저님을 영상 맨 초반에 넣은 이유가 있었네."


"이제까지 만든 공간 영상 중에 이게 제일 낫네."


"근데 이 사람들 내일부터 공간 열 수 있겠죠? 전등 켜는 게 어디 있는지도 모를 것 같은데."


"처음에 좀 헤맬 것 같아요. 인수인계를 그냥 말로 듣더라고요. 한번 주말에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경영지원팀은 3월 이후에도 좀 더 일할 거 같아요. 정산도 해야 하고 정말 끝이 없네요."


"징글징글하다. 정말 끝까지 괴롭히네요."


"아 진짜 코로나 끝나니까 끝나냐. 여기 오자마자 코로나 터져서 진짜 큰 행사들 하나도 못해보고 너무 아쉬워요. 이제 진짜 잘될 일 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없다고 여기ㅜ"


"그래도 전 여기가 더 잘 됐으면 좋겠어요. 전 직장이 막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보다, 잘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제게 좋기도 하잖아요? 솔직히 이제 코로나도 잠잠해지면 잘될 일 밖에 없다고. 그건 좀 아쉽긴 하다."


"저는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또 봐요. 또 볼 수 있잖아요?"


"그래요, 여기 놀러 오세요. 경영지원팀 있을 때 여기 놀러 오세요. 저도 카페 일 때문에 당분간은 계속 올 것 같아요."


"고생하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또 봬요!"




3월 31일. 그렇게 회사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났다.

4월 2일, 난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고, 2주간 자가 격리했다.


걸리길 바란 건 아니지만, 일할 때는 그렇게 피해 가다니 야속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2주 뒤 열은 다 내렸지만, 잔기침은 내내 계속됐다.



오늘로 회사가 없어진지도 두 달이 되어간다.

새로운 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전과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출근길에 종종 그때 생각이 난다.


인스타그램에서 그 공간의 소식을 종종 본다.

날이 좋아져 놀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고, 최근에는 코로나 영향도 덜 받아 야외 공연도 하더랬다.

이전에는 유령섬이었다가 이제야 시장이 바뀌어 좋아졌다는 사람도 있고, 그냥 좋다는 사람도 있고, 매점이 없어져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만난다. 모든 글들은 음성으로 변환되어 갑자기 가슴 안쪽으로 들어와 가슴 안을 쿵 치고 떠난다.


그래도 그 공간 안에 마스크를 벗고 옹기종기 모여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일할 때 더 자주 나와서 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더불어 내 능력을 아득히 벗어난 일을 하염없이 시간을 끌며 붙잡고 있었던 적도, 돌이켜보면 아무 일도 아닐 거라며 스스로 위안되지 않는 말을 되뇐 적도, 우리만 알고 아무도 모르는 작은 성공을 동료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때도. 이제는 전 직장이 되어버린 이곳이 문득문득 생각날 것 같다. 가끔씩 나오는 내 잔기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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