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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 Aug 30. 2024

별자리와 멍자국 (2)

자이살메르 | 별의 크기


짜이를 끓이려는 모양이다. 컵에 모래를 한 움큼 집어넣길래 뭘 하는가 봤더니 그걸 세제 삼아 쓱쓱 닦는다. 대충 터는 꼴이 꼭 어린애들 하는 주방놀이 같다. 마른풀을 뭉쳐 불을 붙이고 주전자를 올려뒀다. 보따리에서 연이어 나온 조리도구는 새카맣게 세월 맞은 흔적이 역력하고, 갓난아이 주먹만 한 감자가 은박지에 돌돌 말려 급히 모닥불 속에 던져졌다.  


개 네댓 마리가 자리를 펴고 앉아 그걸 보고 있다. 오전부터 우릴 졸졸 따라오던 녀석들이다. 목덜미에 야생의 기운이 선연한 그것들이 코를 쳐들면 그 수더분한 길잡이가 날벼락처럼 호통을 쳤다. 그 깜짝에 우리도 덩달아 어슬렁 기회를 엿봐야 할 참이다. 부드러운 홍차 향이 꾸역꾸역 공기를 적시고, 나는 불빛을 발광하며 익어가는 감자를 보고 있었다.


홍차 국물이 주전자 뚜껑 틈으로 바글바글 넘치려고 한다. 소주잔만 한 컵 세 개를 한 손에 모아들고 주전자 주둥이를 조준한 뒤 일순간 높이 올라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붓더니 부랴부랴 달려와 컵 앞에서 싹둑 멈춘다. 김이 폴폴. 윗입술을 모아 두 번 빨아 마시니 달달한 짜이는 꿀꺽 넘어가고 혓바닥 위에 모래알이 빙그르 남았다.


길잡이가 열심히 밀가루 반죽을 치댄다. 접었다 펼치는 손놀림이 나비가 부리는 묘기 같은데, 우리는 명절에 돕지는 않고 괜히 기웃거리기만 하는 얌체들처럼 앉아서 작은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워지는 꼴을 구경하고 있다. 뒤집개 없이도 한 장 태우지 않은 짜파티를 먹기 좋게 반달모양으로 잘라 접시에 담았다. 한 장 손바닥 위에 얹고 향신료 소스와 휘적거린 감자요리를 올려 한 입 넣는다. 독특한 맛. 씹을 때마다 맛이 변하고 숨 쉴 때마다 향이 변했다. 길잡이와 몰이꾼은 겨우 허기 가실 만큼만 먹는가 싶더니 우리가 입맛에 맞지 않아 내려놓은 음식을 조용히 다 먹어 치웠다. 그들은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었다.  


“낙타들은 어디에 있나요?” 몰이꾼이 두리번거리다가 어딘가 가리키곤 내일 아침에 고삐를 매달아 끌고 오면 된다고 한다. 나는 낙타들이 도망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는 곳에서 잠든 모습을 상상하다 마음이 울렁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내일 일정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 자신들의 움막으로 향했다. 그들이 준비한 여윳 장작이 많지 않았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얼굴에 너울거리는 붉은 광채를 느꼈다. 완전한 어둠과 고요였다. 구멍가게에서 사 온 비스킷과 마른안주는 맛이 없었고 밍밍한 맥주는 고약했다. 시원한 맥주가 그립기도 했지만 우리는 깔깔 웃어버리고 주섬주섬 그것들을 해치웠다. 신기하게 성향들이 비슷했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금방 손과 발이 차가워졌다. 그래도 좋았다. 누군가 질문했고 이곳으로 여행 온 이유들을 말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군대에 갔고, 적적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하는 이, 몇 개월 전 이혼을 했고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왔다는 이, 사람들은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다. 당연히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없지만, 나를 대하는 당장의 태도를 믿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그 인상이 관계하는 동안 줄곧 따라다니게 되기 때문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밤에 알았던 사람과는 거리가 생긴 것이다.

모닥불이 완전히 꺼졌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까매져서 하얀 이빨만 둥둥 떠 있을 때까지 대화했고 가끔 눈이 깜빡이면 아직 졸지 않는구나 했다. 이 랜턴의 배터리가 나가면 자자고, 하나씩 자신의 구호용품을 내놓으며 누워서도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다 기억 없는 어느 순간에 잠에 빠졌다.


누군가 내 몸을 흔들며 일어나라 재촉했다. 내가 못 일어나겠다는 신호를 보내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단호한 음성이 돌아왔다. 분명 일어났는데 세상이 암흑이다. 내 손도 보이지 않고 나를 깨운 이도 누군지 모르겠다. 눈을 뜨고 있어도 뜬 것 같지 않아 눈꺼풀을 만져봤다. 꿈 속인지 꿈 밖인지도 모르겠더라.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움막 입구를 들추자 아래로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다. 나는 맨발로 비틀거리며 그들에게로 갔다.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푸른빛이 이마와 콧잔등에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깊은 바다 같은 푸른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역시 꿈 속인가, 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 나는 머리가 잘린 듯 멍청이가 되어서 눈두덩이를 미친 듯이 비볐다. 어디야? 언니, 나 무서워! 나는 지난밤 친해진 언니를 불렀다. “여기야” 그녀가 내 손을 찾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난 네가 보여.”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나보다 먼저 나와서 어둠에 적응한, 그녀의 이마 위로 하얀 기운이 왕왕하고 있었다. 그 기운을 따라 눈길이 위로 솟구쳤다.


그곳에 그저 별뿐이었다. 세어 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쏟은 듯하다는 표현이 정말 맞구나..‘ 나는 눈을 깜빡였다. 별 빛에 눈이 부신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와, 이게 뭐야..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 끝을 흐렸다. 하늘은 저 많은 별들이 무거워서 어떻게 버틸까. 감당할 수가 없어서 주저 않은 것처럼 별이 가까웠다. 다른 세계 같았고, 시간이 마비된 것 같았다. 내 팔짱을 끼고 있던 언니가 가만히 노래를 조근거렸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언니, 이건 작지 않아 했더니 사람들이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그 노래가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줄 몰랐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 동네 뒷산에 오르면 서울 중심부가 훤하다. 볼록하게 솟은 남산과 그 너머로 롯데타워가 보이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자동차들, 날씨가 좋으면 그 앞 광장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러나 꽤 오랫동안 거기까지 오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더라도 적당한 곳까지만 파고들었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 정도로 좋았다. 정상에 모여 환호하는 사람들이나 땀에 흠뻑 젖어서 만족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그들의 마음을 정복 욕구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 앞에서 불현듯 “올라가 봐?” 지금 생각해 봐도 무슨 조화인가, 모르겠다. 제법 가파른 길을 운동화 앞 코만 보면서 올랐던 것 같다. 그 위에 그런 것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파묻혀 살던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모든 것이 하찮은 장난감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동시에 그보다 훨씬 작고, 별 게 아닐 나 자신을 느꼈다. 저 틈바구니 속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개미처럼 보일락 말락 하는 게 나와 같은 존재들이란 것을 깨닫자 갑자기 그동안 내가 했던 걱정과 불안도 하찮아졌다. 들숨과 날숨 몇 번에 작은 티끌처럼 뭉쳐져서 나뒹굴었다. 그 이후로는 좀 더 자주 정상에 오르고 있다. 머리와 어깨가 무거울 때, 걱정과 고민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을 때 그것들이 실상 그럴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싶어서 오른다. 먼지처럼 하찮아지고 싶어서 오른다.



아침이 지난 세계를 지우고 난데없는 하늘을 띄우니 실연당한 것처럼 슬퍼졌다. 그 별바다가 다시 보고 싶으니 그 많은 별들 중 어느 하나를 마음에 띄운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이곳까지 이어 보는 상상, 작아지고 작아져서 보잘 것없는 자신을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우리 곁을 끝까지 에스코트하던 개들은 조식을 마치고 짐을 싸자 냉담한 엉덩이를 씰룩이며 사라졌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지부터 내려봤다.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선명한 피멍이던지,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을 까 뒤집어 봤다. 며칠 내내 말 못 할 고생이었는데, 거의 모든 순간에 엉덩이가 아파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변기에 앉을 때는 특히 낙타 생각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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