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평 방구석 식덕 생활
친한 동생은 목사 사모이다. 얼마 전 더위가 한 풀 꺾인 그의 교회 정원에서 묵상과 명상의 차이가 뭘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묵상과 명상은 다르다고 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식물에게 시간과 노동을 들이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게 된 우리는 식(물)멍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묵상이 중요하다고 말했고 그러나 묵상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명상에 대해서는 그가 뭐라 했는지 아님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에게 식물멍은 명상에 가깝다. 내가 이해하는 명상은 밀려오는 잡념들을 그저 흘러가게 두는 것이다. 초록색 잎들을 한없이 보고 앉아있을 때가 있다.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경험의 단면들이 떠오르고 사라진다. 작은 빛이 여기저기서 명멸한다. 그중 하나의 불빛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 것은 내 온 감각을 초록 식물에게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멍에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몸과 마음이 느슨해진다. 그 잠깐 동안 집착하던 것들에서 벗어난다.
묵상은 말없이 마음속으로 기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기도를 모두 묵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묵도라는 기독교 용어도 있으니까. 묵상 앞에는 흔히 '말씀'이 붙는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 한 구절을 하루 종일 곱씹고 뜻을 새겨보는 일이다. 비기독교인이지만 나는 묵상을 좋아한다. 책 속의 한 문장, 대화 속의 한 문장, 거리를 걷다가 귓속을 파고드는 한 마디를 붙잡고 오래 생각한다. 성경 구절도 묵상할 기회가 종종 있다.
명상이 사유의 이완이라면 묵상은 적극적이고도 집요한 사유 행위이다. 묵상할 거나 있겠나 싶을 만큼 익숙한 십계명 중의 하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묵상해본다. 이 계명은 그 시대의 맥락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작금의 도덕적 명령과 혼동되어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죽은 계명이 된다. 이방인과의 교통을 대역죄로 처벌하던 그때의 유대 사회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체제 전복적 계명이었다. 이웃이란 곧 이방인을 뜻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로 그 계명을 가져와봐도 단순한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 문자 그대로의 이웃은 사실 그때의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이웃이 사라진 시대 아닌가. 그뿐인가 사랑할 수 없는 내 핏줄, 내 식구는 그야말로 이방인이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면 죽은 계명이 살아난다. 당시나 지금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된다. 계명이 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납득하게 된다.
묵상은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텅 빈 문장에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명상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묵상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식물은 나의 명상을 돕고, 글쓰기는 묵상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