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의 200주년 공원에서 길을 잃다.
엘살바도르는 위도상으로는 아열대 기후로 햇살이 꽤 강했다. 하지만 수도인 산살바도르는 해발 600미터쯤에 있어서 항상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강렬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 유미는 이 날씨를 ‘온화한 열대’라 부르며 사랑했다.
유미는 회사 밑에서 점심거리를 사서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제일 번듯하고 큰 200주년 공원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좀 쉬고 싶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커피나무 밭을 지나서 벤치와 원두막이 있는 피크닉장에 도착했다. 유미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 중간의 원두막이 비어있다. 유미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나무에 걸쳐진 계단을 올랐다. 바닥은 더러웠지만 신발을 벗고 대충 앉아 샌드위치를 꺼냈다. 빵에 닭고기와 샐러드를 끼워 넣은 샌드위치는 맛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기 힘들었다. 약간 땀이 났다. ‘이 나라 참 요리 못해’ 중얼거리며 유미는 신경을 더 집중해서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려고 했다. 머리가 빨갛고 꼬리가 긴 새가 화려하고 높은 소리로 울었다.
10분도 되지 않아 샌드위치를 꿀꺽하고 콜라까지 마셨더니 배가 불렀다. 시간을 보니 아직 20분 정도 여유가 있을 것 같다. 엉거주춤 뒷걸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와서 남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개발도상국의 공원이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표지판이 잘 없어서 보통은 구글 맵을 키고 돌아다니는데, 이 날은 왠지 그것도 귀찮았다. 요 며칠 유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큰 고민이 마음을 꽉 채워버린 탓이리라.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국제개발협력은 순수하고 선한 의도로 하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각자의 나라에서의 정치와 행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일이다.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유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공공조직은 확실히 비효율적이야. 주인이 없어.’ 공공기관은 영혼이 없다. 유미는 생각했다. 눈빛도 영혼이 없어. 사람들도 되면 되고 말면 말고 라는 태도로 일하잖아. 그리고 조직으로써도 뚜렷한 목적성이 없다. 그 상태로 20년을 일해왔는데, 앞으로도 15년을 더 그렇게 일할 생각을 하니까 막막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까 좀 더 시원해서 더 깊이 발걸음을 옮긴다. 작은 오솔길로 들어서며 유미는 생각했다. 인사시즌이 되면 여기저기로 보낸다. 전문성이랄 것도 없고 그럴 필요성도 없고, 목적을 잃은 부품 같다. 다시 한국에 가면 또 이런저런 일을 하겠지. 그렇게 해서 정년퇴직을 하면.... 내 꿈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왈왈!”
개 짖는 소리에 유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커다란 개 몇 마리가 입에 고기를 물고 신나게 뛰어가고 있었다. 당황하는 소녀의 손에는 찢긴 비닐봉지가 덜렁거린다. 공원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공원을 만들면서 철거시키지 못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20채쯤 되어 보이는 집들이 하나의 골목에 줄지어 있다. 이런데 들어오면 위험하다고 그랬는데...! 유미는 왔던 길을 되짚어 갈지 골목을 통과해서 빠져나갈지 순간 망설였다. 꽤 오래 걸었던 것 같은데... 돌아가기는 너무 멀어. 유미는 고기 탈취에 만족한 개들 옆을 조심스럽게 걸어 마을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2시, 점심시간은 한참 지나 있다.
유미는 작은 벤치에 주저앉았다. 한낮의 열기가 공원 안으로도 들어왔고, 파리가 윙하며 꼬여든다. 약간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서 온 출장단을 수행하느라 며칠간 무리한 탓인가, 유미는 사무실에 연락을 해서 반차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크지도 않은 공원에서 길을 잃다니’ 유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공원에서 길을 잃은 사건과 겹쳐져 보인다. 그래, 뭔가 바뀌어야 할 때인지도 몰라. 20년이면 정말 긴 시간 동안 같은 일을 한 거니까. 유미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뜨거운 오후 햇살을 받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