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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여행의 목적이 떠남 그 자체에 있을 때도 있다.

엘살바도르의 새벽들

by Jee


유미의 아침은 늘 토미가 깨웠다. 새벽 4시나 5시가 되면 닫힌 침실 문을 긁으며 집사를 부른다. 토미는 유미가 튀니지에서 근무할 때 길에서 입양한 여자 고양이인데, 언제나 자기주장이 강하고 말이 많은 편이었다.

유미는 토미의 재촉을 받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꿋꿋이 참고 침대로 파고들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검은 어둠 속을 더듬어 실내화를 신고 침대 모서리를 가늠하며 거실을 거쳐 넓은 테라스로 나왔다. 해가 뜰 기미마저 없는 짙은 어둠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새벽공기가 차가워 긴팔 옷을 꺼내 입고 테라스에 요가매트를 깔았다. 토미가 다가와 머리를 비비며 아는 척을 한다. 유미는 토미의 머리와 귀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요가매트 위에 자리를 잡았다.

가부좌를 틀고 심호흡을 하니 차가운 공기가 코 끝에 닿았다. 들이마시는 숨에 허리를 펴고 어깨에 긴장을 풀었다. 몸이 조금은 더 길어지는 느낌이 든다. 내쉬는 숨에 진공팩으로 공기를 빼듯이 복부에 힘을 주었다. 고양이처럼 허리를 내리고, 코브라처럼 고개를 쳐든다. 동작을 할 때마다 들어오는 숨이 몸을 깨우듯 흘러갔다. 한 뼘 떨어진 곳에 토미가 앉아 언제 끝나냐며 기다리고 있다. 유미는 일어나 유연성과 코어를 기르는 동작을 이어간다. 어느덧 동쪽으로부터 태양의 붉은색이 어슴푸레하게 구름 사이로 비쳐 들었다. 19층 아파트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레지던스의 공원구역은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의 그 어둠이, 왠지 차갑고 미지의 것으로 느껴진다. 몸을 뒤틀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도시의 어둠과 아침의 붉은빛이 유미에게 뭔가를 말해주려는 것 같았다. 인생의 비밀, 또는 비법 같은 것을.

어두운 밖과 대비되듯, 거실은 노란색의 따뜻한 불빛에 감싸여 있었다. 유미가 누워도 될 정도로 큰 8인용 식탁에는 지난밤에 쓰다만 아이패드와 책, 공책, 펜 같은 공부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다. 유미는 공책에 힘차게 글을 적어나간다. 꼭꼭 눌러서, 변화하겠다. 고 다짐하듯이.

어디로 떠나야 할지,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유미는 아직 몰랐다. 다만, 변화의 때와 왔다고 느낄 뿐이었다.

‘때로는 여행의 목적이 떠남 그 자체에 있을 때도 있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짐을 챙기는 거야’ 유미는 생각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시험점수를 따기 위한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일단 이력서부터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미는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 너무 몰랐다. 이력서를 쓰려고 거실 식탁 앞에 앉을 때마다, 지난 20년 동안 도대체 뭘 한 걸까 자괴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거쳐왔던 팀과 업무들을 기억과 기록을 뒤져 쭉 쓰고 보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거 했다 저거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개업풍선인형처럼, 이거 뭐 흐름이 없어, 싶었다. 당연한 건가. 그 많은 업무 중에 내가 선택한 업무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냥 싹 불태워버리고 싶구나’ 하는 기분을 유미는 꾹 눌렀다. 20년이나 청소를 안 한 아파트 베란다가 있다면 어지럽고 정리가 안된 게 당연한 거야,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드는 게 당연한 거야. 유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잘 찾아보면 유미가 잘하는 것, 유미의 전문성이 보일까, 고민하다가 말다가, 한 달을 씨름했다.

이력서가 잘 안 써질 때마다, ‘직장을 바꾼다고 행복해질까?’ 하는 의문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왜 굳이 이직을 하는 거야? 일도 너무 익숙하고, 돈은 지금도 충분히 벌고 있잖아.’라고. 하지만 유미는 ‘이대로 정년까지 다니다가 퇴직하면 넌 자신이 뭘 원하고 뭘 할 수 있는지 모른 채로 다시 세상에 던져지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이 유미를 자꾸 움직이게 했다.

마음을 다잡고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영어로 된 문서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새벽마다 거실 식탁 앞에 앉았다. 폭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한 달쯤 지나니 어느 정도 흐름이 보였다.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되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지원서를 제출했다. 5군데쯤 지원서를 냈을까, 어떤 곳도 면접을 보자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5군데를 더 넣었다. 차가운 새벽들은 자꾸 흘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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