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를 버리는 것

by 신성규

나는 증오를 버리려 노력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증오가 나를 잠식하지 않게 하려고 하루하루 싸운다.


증오는 단순한 분노보다 훨씬 더 뿌리 깊은 감정이다.

그것은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는다.

누군가를 미워했을 때,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사라져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마음속에서 붙잡고, 곱씹고, 무너진다.

증오는 타인을 향하는 듯하지만, 결국 나를 해치는 감정이다.


처음엔 몰랐다.

그 감정이 내 안에서 차오를수록 나는 더 강해지고, 더 선명해지는 줄 알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싫다’는 생각은

나에게 일종의 힘과 방향을 줬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각성일 뿐,

결국 나를 지치게 하고, 내 시야를 흐리게 했으며,

내 안에 있는 좋은 감정들마저도 오염시켰다.


사람의 좋은 점만 보려는 노력은

어떻게 보면 순진한 이상주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


세상엔 분명 나쁜 사람도 있다.

악의적인 말로 상처를 주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삼고,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조차 거칠게 군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험했고,

때로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무너졌을 때,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그때 나는 증오를 배웠다.

그 감정은 내 안에서 뿌리를 내렸고,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 감정에 기대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내가 붙잡은 건 감정이 아니라, 독이었다.

그 감정이 내 생각을 마비시켰고,

나의 말투를 바꾸었으며,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까지도 변질시켰다.


그래서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내 감정의 잔인한 통치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타인의 허점에서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기보다는,

그 사람의 아픔과 방어기제를 읽어내고,

그래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하고 유약한지 기억하고 싶다.


이건 쉽지 않다.

좋은 점을 보려는 노력은,

내가 먼저 부드러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시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함께 오는 용기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불안을 넘어서야 진짜 자유가 온다.

증오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잡은 감정이었지만,

결국 나를 묶고 있었던 사슬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묻는다.

나는 왜 미워했는가?

왜 그렇게 분노했는가?

그리고 왜 그 감정을 오래 품었는가?


대답은 하나다.

그만큼 아팠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무너졌던 내가,

다시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그건 살아남기 위한 방어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더는 방어만 하며 살고 싶지 않다.

나는 회복하고 싶다.

나는 다시 사람을 좋아하고,

내가 좋아한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다시 누군가의 좋은 점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증오는 내 것이 아니다.

그건 내 안에 오래 있었던 감정일지언정,

나의 본질은 아니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이제는 ‘증오’가 아니라,

‘이해’와 ‘단절’이라는 이름의 더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는

미워하지 않고도 떠날 수 있고,

사랑하지 않고도 평화로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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