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이 청년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국민연금 개혁을 언급하며,
“하지 않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는 말을 했다.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표면적으로는 이 말이 그럴듯하다.
어떤 사안이든 시작이라도 하는 것,
완전하지 않더라도 건드리는 것,
이런 실용주의적 자세가 현명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면피의 철학이자,
정치의 책임을 흐리는 언어다.
국민연금은 청년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제도다.
그런데 “일단 손댔다”는 사실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정치는 시도가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의 구조여야 한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일단 했으니 됐다’는 논리가 정치적 논의와 비판을 중단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한 번 논의된 사안’은 폐기된 것처럼 다뤄지고,
청년의 목소리는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말로 봉쇄된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저항은 왜 존재하는가?
노동운동은 왜 목소리를 내는가?
적당히 타협하고, 조금만 바꾸면 된다는 생각이라면
우리는 왜 거리에 나가야 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청년은 늘 사이의 존재다.
정치인들은 “청년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진보든 보수든 정작 모든 권한과 설계도는
586 세대가 쥐고 있다.
“모든 세대를 위한 정치”란 말은,
기득권 세대가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적 수사일 때가 많다.
모든 세대를 위한다면, 왜 청년은 정책 결정 테이블에 앉지 못하는가?
왜 청년의 분노는 언제나 ‘감정적’이고,
586의 결정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포장되는가?
이제 청년은 더 이상
‘진보 청년’, ‘보수 청년’이라는 딱지 속에 머물러선 안 된다.
그 언어 자체가
586 구조 내부에서 만들어진 정체성의 장치다.
청년은 이제 자신만의 당을 만들어야 한다.
586이 설계한 프레임 밖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양날의 구도 자체를 넘어서서
미래의 생존, 일자리, 연금, 주거, 자유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 진출”이 아니다.
청년 스스로가 권력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작업이다.
저항은
단지 분노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아직 너희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지 않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는 말에 속지 않는다.
우리는 ‘시도’가 아니라 ‘재편’을 원한다.
우리는 ‘참여’가 아니라 권력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청년은 저항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모두의 계산 바깥에서,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언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