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 구조화되지 않은 고통,
드러나지 않은 부조리를 먼저 체감한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미래의 실험이다.
세상의 균열을 감지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곧 예술의 본질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본능적으로 정상성의 경계를 의심하고, 기존 질서를 넘어서는 탈경계적 시도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술가는 항상 어느 정도 진보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존재는 시스템 바깥에 있고, 그들의 감각은 미래에 닿아 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란 단순히 정보를 쌓는 행위가 아니다.
공부는 세계에 대한 감수성과 분석력을 확장하는 과정이다.
사유를 깊이 하면 할수록,
인간과 사회가 얼마나 쉽게 고정관념에 갇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역사를 배울수록 ‘이것은 불변의 질서가 아니었구나’라는 걸 깨닫는다.
철학을 배울수록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유연성에 익숙해진다.
사회학을 배울수록 ‘구조가 개인을 규정한다’는 인식이 생긴다.
결국 공부란, 세계의 다양한 고통을 인식하고 구조를 비판하는 능력을 키운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이 점점 더 진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곧
세계의 고통에 더 많이 반응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감수성은 결국
타인의 부조리를 함께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이끈다.
이런 흐름은 역사의 큰 물줄기와도 맞닿아 있다.
보수가 아무리 막으려 해도,
세계는 늘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왕정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왔다.
노예제는 폐지되고 인권이 보편화되었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생기고, 동성애는 더 이상 죄가 아니다.
이 모든 흐름은 보수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인내와 상상력이 이룬 성취다.
보수는 지키려 하고, 진보는 넘어서려 한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넘어서려는 의지의 총합에 가깝다.
보수는 정밀한 기술을 다듬는다.
진보는 새로운 기술을 만든다.
독일, 일본은 보수적이지만 세부 기술에 강하다.
기존 질서 안에서 ‘정밀도’를 높이는 능력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 오픈AI 같은 진보적 생태계는
‘그 질서 자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보수의 기술은 수직적으로 진보하고,
진보의 기술은 수평적으로 전환한다.
둘 다 중요하지만,
미래를 여는 것은 항상 새로운 언어를 만든 사람들이다.
보수가 전통과 기술의 정밀함을 지키는 힘이라면,
진보는 새로운 언어와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힘이다.
독일과 일본이 뛰어난 세부 기술력을 가진 것도,
그들의 문화와 정치가 매우 보수적이고 조직 중심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정해진 틀 안에서 최적화하는 데 능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 전환은
언제나 그 틀 바깥에서 벌어진다.
예술가가 진보적인 이유,
지식인이 구조를 비판하게 되는 이유,
보수가 기술을 지켜도 세계가 결국 진보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의 핵심에는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멀리 내다보려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있다.
진보란,
세상을 더 낫게 만들겠다는 감수성 있는 상상력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만이,
우리 모두를 다음 시대로 이끌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