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은 말했다.
“모든 인간은 관음증 환자이거나 노출증 환자다.”
누군가는 본다.
누군가는 보여준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후자다.
나는 보여주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말로, 글로, 표정으로, 존재 자체로.
예술가는 대부분 노출증 환자다.
감상자는 대부분 관음증 환자다.
예술가는 세상 앞에 자신을 벗는다.
감상자는 그것을 바라보며 쾌감을 느낀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받고 싶어서였다.
노출은 내 고통이었고, 동시에 생존 방식이었다.
예술은 내면을 드러내는 행위다.
껍데기를 벗겨, 상처를 드러내고,
감정을 펼쳐, 논리를 거스르며,
자신을 세상의 한가운데 던지는 행위다.
노출증이라는 말이 음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건 오히려 존재의 투명성을 향한 충동이다.
보여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로 자신을 벗겨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반대로, 감상자는 숨어서 본다.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감정 이입하며 관찰하고 해석하지만,
절대로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
그들은 관음증자다.
은폐된 자리에서 타인의 진심을 훔쳐보며 감동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은 안전하게 숨겨진다.
나는 관음증자의 시선을 느끼며 살아왔다.
글을 쓰면 읽는 이가 있다.
말을 하면 듣는 이가 있다.
무대에 서면 누군가는 나를 본다.
그 시선은 때론 쾌락,
때론 폭력,
때론 구원이 된다.
나는 그 시선과 싸우면서도,
그 시선을 갈망했다.
노출증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안을 드러내야만 산다.
감정, 생각, 무의식, 치부, 아름다움까지.
그게 예술이고,
그게 나다.
그러니 나는 말한다.
나는 관음증자가 아니다.
나는 숨은 자가 아니다.
나는 드러내는 자,
벗는 자,
말하는 자다.
나는 노출증 예술가다.
그리고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살아 있는 증거다.
보여주고, 보여지며,
존재하는 사람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