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가즘,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포옹

by 신성규

욕망이 극에 달하면 인간은 생존 본능조차 잠시 잊는다. 강렬한 섹스의 오르가즘 순간, 일부 여성들은 “죽어도 좋다”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신경생리학적으로 여성의 성적 쾌감은 남성보다 길게 지속되며, 파동이 겹쳐지듯 연속적으로 밀려온다. 그 감각의 몰입은 마치 죽음을 연상시키는 황홀경, 일종의 ‘의식의 소멸’을 경험하게 한다.


문학과 미술 속에서 쾌락과 죽음은 오랫동안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조르주 바타유는 오르가즘을 ‘작은 죽음’이라 불렀다. 그는 성적 절정이란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개인의 존재를 일시적으로 해체시키는 죽음의 연습’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는 찰나가, 동시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좋다고 느끼는 순간이라는 이 아이러니가,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를 자극했다.


프로이트 역시 쾌락과 죽음을 떼어놓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본능을 에로스(Eros, 생의 본능)와 타나토스(Thanatos, 죽음 충동)로 구분했다. 에로스는 삶을 확장하고 연결하려는 힘이며, 타나토스는 해체와 소멸을 향하는 본능이다. 오르가즘의 순간은 이 두 충동이 동시에 작동하는 드문 순간이다. 몸은 극도의 생명력을 느끼지만, 의식은 경계를 허물고 사라짐에 가까워진다.


사도-마조히즘의 미학도 이 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가학과 피학, 통제와 복종의 권력 게임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고통과 쾌락의 경계’에 있다. 고통이 일정 강도를 넘어서면 뇌는 이를 쾌락으로 변환한다. 오르가즘의 절정이 신체적·심리적 한계와 맞닿아 있을 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 드러난다. 그것은 통제력을 내려놓고, 자아를 해체하며, 순간적으로 죽음을 스치는 듯한 몰입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다.


예술사에서도 이 주제는 반복된다. 바로크 시대의 성녀 테레사의 ‘황홀경’ 조각은 종교적 환희와 성적 황홀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했다. 로댕의 조각에서도 육체의 뒤틀림은 쾌락인지 고통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일본의 우키요에와 서양의 관능화 속에서도, 쾌락은 종종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인간이 육체를 탐닉하는 모습은, 그 끝에서 삶의 덧없음과 허무를 드러냈다.


결국 오르가즘은 단순한 성적 쾌감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가 무너지고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삶의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하는 동시에, 소멸의 유혹이 스며드는 경계의 체험이다. 인간은 이 경계에서 본능적으로 매혹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가 평소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턱이지만, 그 문턱을 쾌락 속에서 넘나드는 드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과 죽음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 얼굴이다. 하나는 우리를 살게 하고, 하나는 우리를 끝내게 하지만, 절정의 순간 그 둘은 한 점에서 겹친다. 그리고 그 한 점이야말로, 인간이 삶과 죽음을 동시에 이해하는 가장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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