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름다움을 말하는가

by 신성규

나는 미학, 미인,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되묻는다.

“미인을 밝히는 거야?”

아니, 그건 너무나 천박한 해석이다.

나는 미를 밝히는 사람이지, 미인을 소비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 오해의 지점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곧 쾌락과 성적 욕망의 코드로 해석해버린다.

하지만 내게 아름다움이란

그저 육체를 탐하는 말초의 쾌락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경외의 감각이다.


내가 아름다움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

그것을 느끼는 순간의 감응,

그리고 그것 앞에서 겸허해지는 나 자신 —

이 모든 것이 나를 사유하게 만들고, 나를 정화한다.


나는 꽃을 볼 때,

물의 표면을 볼 때,

한 사람의 눈동자가 깊은 고요를 담고 있을 때,

말할 수 없는 감정의 높이를 느낀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다.

소비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

단지 찬미하고 바라보는 것.


사람들은 종종 ‘미인’이라는 단어에

이미 성적 코드와 소유 욕망을 덧씌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미인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결정체이자, 정서의 도형이다.

내가 말하는 미인은 ‘대상’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탐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멀리서 감지한다.

그 사람이 지닌 빛, 고요, 태도, 눈빛, 그 안에 담긴 우수와 결 —

그 모든 것이 감각을 일깨운다.


미인은 나의 연인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스승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을 닮고 싶은 감정.

내 삶에도 그런 결이 흐르길 바라는 무언의 기도.

나는 그래서 말한다.

미인을 보는 감각은 내 인생의 철학과 닿아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욕망.

권력, 명예, 부, 사랑, 인정…

그 모든 것은 결국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에서 출발한다.

정리된 삶, 명료한 삶, 고결한 상태를 향한 감각 —

그 모든 이면에는 조화와 빛,

즉 미적 충만함에 대한 그리움이 숨어 있다.


누군가는 몸을 가꾸고,

누군가는 계급을 오르려 하며,

누군가는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한다.

그 밑바닥엔 다름 아닌,

“아름답고 싶다.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다.”는 깊은 본능이 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은 쾌락이 되거나, 예술이 되거나, 철학이 된다.

아름다움은 모든 욕망의 근원이다.

나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는다


쾌락은 곧 사라진다.

소유는 곧 식는다.

하지만 순수한 아름다움은 시간 위에 서서 빛난다.


나는 그것을 본다.

도시의 시끄러운 풍경 속에서도

잠깐 마주친 한 사람의 눈동자에서,

또는 하릴없이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 속에서조차도.


그것은 단지 외모의 정합성, 비율, 조형성만이 아니다.

고뇌와 고독, 자각과 침묵이 응축된 입체감.

나는 그걸 볼 수 있을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욕망이 향하는 그 끝에는 언제나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찬미의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순간을 오래 바라보고 싶은 마음.

그 찬미가 사랑으로, 예술로, 철학으로 이어지는 삶.

그런 삶을 나는 원한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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