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예술을 혐오했다.
아니, 기성 예술, 제도화된 예술을 혐오했다.
그건 타락의 냄새 때문이었다.
고상한 척하는 그 외피,
윤리의 경계를 슬쩍 넘으며도 스스로를 “천재”로 치환하는 그 자의식.
나는 그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다.
예술이란 본디 인간의 영혼에서 길어 올려진 진실이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본 현실의 예술계는
돈을 통해 입장권이 주어지는 세계였다.
많은 예술대는
과외 선생과, 평가를 내리는 교수와의 카르텔로 둘러싸인 하나의 성역이었다.
들어갈 수는 있다. 돈이 있으면.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예술인가?
재능이 아니라 구조로 입장하는 세상이라면,
그곳에서 피어나는 감정은 어디까지 진짜인가?”
나는 예술 교수들 중 일부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상한 권위를 보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칭하며
학생들에게 심리적, 물리적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예술은 규범을 뛰어넘어야 해.”
나는 묻고 싶었다.
“그게 정말 예술의 이름인가?
아니면 도덕적 비겁함을 숨기기 위해 예술을 방패로 삼는 것인가?”
이것은 단지 한두 명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이 도덕적 면죄부를 부여받는 구조,
그 구조 안에서 무감각하게 반복되는 착취,
그리고 그것을 이해받아야 할 ‘천재의 괴팍함‘으로 포장하는 사회.
나는 그 지점에서 예술을 혐오했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교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길거리의 낡은 벽화나
작은 관중들 속 바이올린을 켜는 무명의 연주자에게서
더 순수한 예술을 느꼈다.
그들은
관객의 박수 없이도 계속했고,
돈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몰입했다.
그곳엔 ‘작품 해설’도 없고, ‘큐레이터’도 없지만
감정은 있었다.
서늘한 고독과, 말없이 건네는 어떤 진심.
나는 거기서 예술의 원형을 보았다.
자기 존재를 확인받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스스로에게 고백하는 행위로서의 예술.
지금도 고급 예술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태도를 보면
내 안의 회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술은 누군가의 계급이 되면 안 된다.
예술은 누구의 감정도 배제하지 않는,
열린 상태의 언어여야 한다.
나는 예술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다만,
거짓된 예술을 거부한 것뿐이다.
나는 지금도
숨은 채로 자신을 꺼내는 자들,
길 위의 언어들,
광장의 외침에서
더 깊은 울림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짓는다.
진짜 예술은, 도덕의 무능함을 핑계 삼지 않는다.
진짜 예술은, 고통과 책임과 감정을 모두 끌어안고,
스스로를 벼려내는 과정이다.
나는 그런 예술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런 예술만이, 타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