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여행일기(2015)
인구 3만 명의 작은 시골 마을,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마치 공룡의 화석같이 거친 표피가 드문드문 드러난 산, 카르스트 지형이라는 학술적 이름을 지닌 수려한 경관.
이곳은 유럽여행자들을 주역으로 한 연간 15만 명의 여행자들이 방문하는 배낭여행자들의 성지이지만 자연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
‘방비엥’은 참으로 이상한 곳이다.
작은 마트(따지고 보자면 편의점이다) 여러 개와 음식점, 숙박업소, 두 개의 마사지 샵이 전부로 시가지라고 한다면 느린걸음으로 10분 내로 돌아볼 수 있는 산골마을이지만 클럽이 두 개, pub이 제법 여러 개 있다.
그리고 이 중 하나인 사쿠라 바(중국인이 주인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사쿠라바이니 이도 참 이상하다)는 라오스를 통틀어 여행서적에도 그렇고 여행자들의 SNS에서 소문난 가장 핫한 장소로 손꼽힌다.
이 클럽을 기점으로 상가들이 모여 있는 (그나마도 20개 남짓한 상가) 중심가를 벗어나서 약 이백 미터만 지나쳐가도 너무나 동떨어진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며칠을 붕붕 뜬 상태로 축제(삐 마이라오)모드로 맞춰져 있던 몸을 금방 ‘나른한 휴식모드’로 낮춘다는 것은 아직 흥이 채 식지 않은 우리같은 여행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 굽이굽이 둘러 감싼 산은 구름에 맞닿아서야 더 이상 위로 뻗도록 허락받지 못한 듯, 거의 이 마을의 주인공 같다. 아니면 이 곳만 구름이 유독 낮게 깔리는 걸까
마을을 둘러 싼 산과 그 사이사이를 유유히 흘러가는 강. 강가에 자유롭게 내버려져 풀을 뜯고 있는 소.
그리고 그 속에는 어느 순간에도 활발하고 떠들썩한 노란머리 관광객들. 안 어울리는 듯 하지만, 또 그런 관광객들을 뺀 경치는 재미가 없다.
이곳에는 무엇이든 나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유난히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 곁에 비어라오 한 잔하며 가만히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만사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과 함께 나른해지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저 위쪽에서 몇 마리의 소들이 더위를 식히며 강물에 똥을 싸는 모습을 보게 된다해도 지금 자리잡고 않은 이 자리를 옮기기가 싫어 진다.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며 마치 기분좋은 낮잠을 자는듯하다.
우리뿐만 아니다. 낮에 길을 걷다 보면 여행자들은 간밤 사쿠라바에서의 숙취 때문인지, 아니면 이 곳 특유의 나른함 때문인지 노곤한 눈빛으로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식당에 누워 잠을 청하곤 했다.
개들도 마찬가지다. 대낮엔 그늘에 자리 잡고 가로로 누워 천하태평하게 잠을 잔다
대낮에 활기를 띄는 것은 길거리 음식점뿐이다.
이곳의 거리음식점은 맛과 가격 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꽤나 유명한대 대표적인 메뉴로 2인분은 될 만한 커다란 바게트 샌드위치와 악마의 잼이라 불리는 누델라 초코잼, 바나나가 들어간 환상의 팬케익, 신선한 과일이 그대로 갈린 과일주스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방비엥에 가면 굳이 레스토랑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레스토랑이라고 불릴만한 곳도 몇 군데 없다. 먹는 것, 입을 것을 모두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푸짐한 바게트 샌드위치, 첨가재료는 직접 고를 수 있다.
우리는 남쏭강을 따라 튜빙을 하기로 했다.(튜브를 타고 물살을 흘러내려가는 코스), 방비엥의 레포츠 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로 우기에는 급류에 휩쓸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니 조심해야 한다기에 슬쩍 겁이 나기도 했다. 이 코스가 인기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강을 따라 강변에 bar가 쭉 있고 중간중간 튜빙을 하다 원하는 곳에 멈춰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하면서 즐기다 다시 내키면 물살을 타고 내려가고 또 원하는 곳에서 즐길 수 있는 강가 클럽투어와도 같기 때문이다. (지금은 잦은 인명사고 때문에 많이 사라지고 몇몇 곳만 남았다고 한다.)
실제로 튜브를 타고 위로 길게 솟은 뾰족 산을 바라보고 누워 있다 보면 바에서 사람들이 나와 호객행위를 한다. 마음을 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바로 들어오라며 물을 담은 패트병을 끈에 달아 던지거나 끝이 옷걸이 윗부분처럼 굽은 장대로 튜브를 끌어당기는 모습이 연출된다. 타의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들은 튜브에 앉은채로 바둥거리며 손사래를 치지만 이내 시끄러운 음악과 맥주 한잔에 들떠 있는 바의 분위기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튜브를 내팽개치고 그 대열에 합류하고 만다. 그것이 이 곳의 풍경이다.
유난히도 평화로운 자연풍경과 그 속에서 유난히도 들뜬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물에 떠내려 가며 경치 감상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편안하지 않다. 따가운 햇살이 정면으로 내리쬐기 때문...
방비엥에 가면 슈퍼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잡화들을 판매하고 있다.
이곳에서 ‘tubing in vangaieng’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와 바지가 가장 인기 있는 물건이다. 일종의 브랜드이미지처럼 생겨진 이 문양은 이곳 여행자들이라면 모두들 걸치고 다닌다. 한화로 약 2천원에 티, 바지 관계없이 살 수 있으니 야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원피스보다도 저렴하다. 색상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회색, 보라, 연회색, 민트, 검정, 자주, 흰색 등 아마 세계인의 취향을 알지
총총, 바삐 갈길을 가는 송아지. 곳곳에서 가축을 방목해 기르고 있다.
못하니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색상을 가능하면 하나씩 다 찍어낸 듯하다. 라오스의 강은 메콩 강을 중심으로 뻗어나온 흙빛(빛깔만 흙이 아니다, 어떤 지점에서는 진흙도 묻곤 한다)으로 물놀이를 할 때 부담없이 입기에 좋고 얇고 가벼워 갑자기 내리는 비에 쫄딱 젖어도 금방 마르니 그만한 옷이 없었다.
그러니 여행자들이 좋아할 만한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이다. 이 옷만 입으면 세계의 여행자들과 커플룩을 입고 다닐 수 있다.
언젠가 강가 원두막에 앉아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며, 방목해 놓은 소들이 강에서 물도 마시다 똥도 누는 장면을 목격하고 흙색 강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은 흙이 침토되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소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물놀이에 흥미가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얇고 가볍고 잘 마르는 옷이라 여행에 이만한 것이 없다. 지금도 집에서 잘 입으며 ‘이 옷 색깔별로 몇벌 더 사올걸’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곳 방비엥은 그랬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곳, 볼 것도 없는 곳(자연경관은 그 어디에 뒤지지 않지만 멈춰있는 사진을 보는 듯한 정적인 느낌이다), 그렇기에 지금 현재가 그리고 내가 더욱더 분명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비가 한번 내리면 무슨 일이 날 것처럼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내린다기보다는 때린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1시간, 길게는 2~3시간 대지를 실컷 두드리고 나면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투명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젖은 세상에 열기도 한풀은 꺾이고, 곳곳에 비가 땅을 거세게 때린 흔적은 발목까지 오는 물웅덩이로 알 수 있다. 이마저도 몇 시간 후면 증발해서 사라져 버리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고 태양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비가 잠재우고 그런 곳이다.
레포츠를 하거나, 하릴없이 쉬거나, 아무 생각없이 멍 때리거나.
그러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더우면 라오비어를 한 잔 마신다. 흙빛 소똥이 떠다니는 강에 몸을 담글 수도 있다.
세찬 비가 한차례 지나간 후 무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