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고 생각했던 추석 연휴가 휘리릭 지나고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다.
실습 2주 차에는 회원님들 앞에서 새로운 작품의 동작을 설명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과정이 포함된다. 보통 이런 걸 ‘작품을 푼다’고 한다.
내가 풀게 될 첫 곡은 김건모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내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가사가 사랑스럽다. 안무도 어렵지 않아서 신나게 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단순히 동작만 외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 한 곡을 ‘회원님들께 푼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나나쌤은 ‘사랑해의 순서지를 써오라’고 하셨다.
순서지는 곡의 동작 순서를 정리한 종이인데, 사실 나는 순서지를 처음 본 까막눈이었다. 이번에 직접 만들어보니 안무 숙지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실감했다.
모든 일이 그렇다. 알고 나면 별거 아닌데, 모를 땐 막막하다.
그렇지만 스스로 해보기로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속으로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을 세고, 8 카운트마다 영상을 멈춰 동작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밤이 깊어갈수록 더 궁금해졌다.
‘이걸 도대체 기호로 어떻게 써야 하지?’
결국 참지 못하고 선생님께 톡을 드렸다.
순서가 어딨 냐고 물으셔서 동작 순서대로 써서 보내드렸다.
“4번 동작도 빠지고 별표 위치도 틀렸어요.”
“다시 쓰세요.”
“두 번째 별표 빠졌고요.”
“다시요, 틀렸어요.”
“인트로 포함하면 7개네요? 틀렸어요. 다시요”
“동작이 비슷한 건 4, 4' 이렇게 써요. 다시 쓰세요.”
이쯤 되면 톡방엔 ‘다시요’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다시, 다시, 다시—
결국 반복된 ‘다시’ 덕분에, 나는 순서지의 언어를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했다.
보통 32 카운트를 1 동작 또는 1박스로 표현
32 카운트가 아닐 때는 괄호 안에 박자 표시 예: (16), (64), (4)
번호와 번호 사이 남는 박자에는 별표 표시
가사부터 1 동작으로 표시
가사 없는 멜로디 부분은 A, B 등 알파벳으로 구분
비슷한 동작은 A, A′로 구분
동작이 단순하면 상황에 따라 64박자도 가능
대여섯 번은 고쳐 쓴 끝에야 비로소 제대로 쓴 순서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오전 드로잉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스케치북에 매직으로 순서지를 썼다. 글자가 잘 보이게 두껍게, 고딕체로, 정성껏. 놀랍게도 이게 뭐라고 쓰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숙제 하나를 마쳤다고 좋아하며 학원에 갔는데, 제시카 쌤이 내 순서지를 보시고는 글씨가 왜 이러냐고 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해 정성껏 썼기 때문이다.
“숫자가 눈에 안 들어오네요. 이건 아니에요. 다시 써요.”
또 다시다. 선생님은 색지를 사 오셨고 나는 글씨 쓰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매직을 돌리지 말고, 세로획은 두껍게, 틈이 생기지 않게 꾹 눌러서 쓰기.
내가 한 시간 동안 써서 가져온 순서지는 단박에 ‘연습장’이 되었다.
제목은 크게 먼저 쓰고, 가수 이름은 작게
인트로나 남는 박자는 작게
1절, 2절은 줄 바꿔서
색지엔 연필로 먼저 위치 잡고 매직으로 덧쓰기
글자의 세로가 두껍게 쓰기
매직을 여러 번 덧칠하지 않기 : 한 번에 쓰기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다시 쓴 순서지는 전보다 훨씬 단정했다. 글씨가 큼직하고, 선명했고, 눈에 쏙 들어왔다.
순서지를 다 쓰고 카운트와 동작 설명을 연습했다. 나는 말하는 직업이지만 “카운트로 말하기”는 또 다른 언어였다.
“카운트로 해보겠습니다. 시작! 음... ”
“시작! 하면 멈추지 말고 바로 원, 투, 쓰리, 포... 설명해요. “
“음...”
“음 하지 말라니까~”
곡에 대한 설명은 짧고 간결하게
뜸 들이지 말고 “시작!” 하면 바로 시연
몸을 돌리지 않고 거울로 회원님 보기
어려워하는 부분만 다시 짚기
처음부터 끝까지 카운트 유지
선생님 앞에서 두어 번 카운트와 동작 설명 연습한 다음 피드백을 받고 실습 센터로 향했다.
센터에 도착해서 거울 위에 순서지를 붙여두자 노란색이 눈에 띄었는지 회원님 한 분이 말했다.
“글씨가 예뻐요!”
그 한마디가 얼마나 기분 좋았던지. 제시카 선생님이 왜 글씨를 예쁘게 쓰라고 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나나쌤이 "교육생 앞으로 나오세요" 부르셨을 때, 조금 긴장이 되었다. 앞에 서자 선생님이 마이크를 채워주셨다.
“회원님들, 오늘 배우실 곡은 김건모의 사랑해입니다.”로 작품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떨렸지만, 배운 대로 차근차근 설명하고 카운트로 동작을 함께 해보았다.
움직이면서 말을 하려니 숨이 차올랐지만 엉망은 아니었다.
다 마치고 나나쌤이 “잘했어요. 수고했어요.” 하셨을 때, 큰 숙제를 잘 끝냈구나 안도했다.
무엇이든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운다. 가르치는 일은 결국 배우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며 미루기보다, 부족하더라도 배우고 채워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는 걸 이번 실습을 통해 몸으로 체감했다.
비록 내가 쓴 순서지는 휴지통으로 직행했지만, 배우고 고치면서 ‘실습생으로서의 성장’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