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전날, 최종 리허설까지 마쳤다.
거울 속 나를 바라보는 두 선생님의 표정에서 이번 오디션에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구나’ 하는 감각이 스쳤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지금의 내 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인정하기로 했다.
저녁 타임 다이어트 댄스 수업은 참여하지 않았다. 내일이 오디션인데 지금까지 안 되던 동작이 하루아침에 될 리 없었다. 차라리 늦지 않게 귀가해서 의상과 마음을 정리하고 충분히 자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과 아이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 온 나를 반겨주었다.
“엄마, 진짜 내일 시험 보는 거야?”
아이의 눈빛이 괜히 나보다 더 반짝였다.
남편은 “오늘은 무조건 일찍 자자”며 숙면을 거듭 강조했다.
결전의 날,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깼다.
오디션은 10시 시작. 7시까지 학원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평소라면 자전거를 타고 갔겠지만 비가 오니 걸어가기로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에게 데려다 달라는 말은 애초에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6시 반쯤 남편이 일어나서 나와 같이 나갈 준비를 하더니 “차로 데려다줄게.”라고 했다.
"정말?"그 한마디에 내 두 눈이 똥그래졌다. 어제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며 미소 짓는 남편을 보는데, '이게 무슨 횡재냐'며 웃음이 났다.
살짝 긴장된 새벽의 공기 속, 남편의 소소한 배려가 든든하고 큰 힘이 되었다. 그날 학원까지 가는 길에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응원이란 거창한 말보다 비 오는 아침에 묵묵히 운전대를 잡아주는 그 손에 있다는 걸.
학원에 도착하니 조용했다. 조명이 켜진 공간에 나 혼자였다.
곡마다 플레이를 눌러 처음부터 끝까지 거울 앞에서 한 번씩 춰 보면서 실전에서는 “틀리지만 말자, 틀리지만 말자”만 되뇌어 보았다.
잠시 후, 선생님들이 도착하셨다.
심사위원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옮기고, 현수막을 세우고, 음향 장비를 점검하시느라 분주했다. 스피커에서 짧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마음이 덩달아 뛰었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이 공간에 익숙하다. 나는 준비되어 있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더니 긴장이 약간 누그러졌다.
심사용지와 명찰, 순서표까지 꼼꼼히 챙기시는 모습을 보니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싶었다.
지난 기수 선배인 선생님이 과일과 초콜릿을 한 봉지 들고 와 “파이팅!”이라며 웃어주셨다. 짧은 응원 한마디와 웃음 덕분에 순간 편안해졌다.
제시카 선생님은 북엇국과 파김치, 전까지 정성 가득한 도시락을 싸 오셨다. 그 마음이 따뜻해서 잠시 오디션이 아니라 소풍 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훈훈한 에너지 덕분이었을까. 많이 떨릴 줄 알았는데, 염려한 것만큼 긴장되지 않았다.
마음속에 ‘이제는 잘 마무리해 보자’는 여유가 살짝 자리 잡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10시. 곧 심사위원 두 분이 도착했고, 행사를 진행하시는 선배님이 대기실 벽에 오디션 순서지를 붙이시면서 안내해 주셨다.
“곧 시작합니다. 이름표는 상의 오른쪽 아래에 달고, 이름 부르면 바로 입장하세요!”
"제9기 에어로빅 지도자 자격증 졸업 오디션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사회자가 진행 멘트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공기마저 살짝 긴장한 것 같았다.
에어로빅, 걸스, 힙합, 나이트, 자유곡, 티칭, 근력 순으로 오디션은 차례로 이어졌다. 중간에 파트너가 바뀌는 돌발 상황이 있었지만, 심장이 터질 듯 뛰거나 손이 덜덜 떨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심사평에서 “너무 차분했다”는 말을 들었나 보다.)
체념이라기보다는, 이번 오디션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건 ‘지금의 나’ 그 자체라는 생각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무대 앞쪽에서 나를 바라보던 제시카 쌤의 표정은 마치 선생님이 심사를 받는 것처럼 진지했다. 선생님이 나보다 더 긴장하신 듯했다. 내가 실수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셨을지도 모른다. 그 시선이 은근히 든든했다.
장르마다 한두 번씩은 소소한 실수를 했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실력보다 더 잘하지도,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 ‘현재 버전의 나’를 보여준 오디션이었다.
모든 순서가 끝나자 몸과 마음이 동시에 풀렸다. “야호! 끝났다!” 그 한마디가 속에서 터져 나왔다. 후련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대기실 매트 위에 그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근육들이 하나둘씩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현듯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 나 오늘 이런 것도 도전했어요. 춤 자격증이래요. 즐겁게, 열심히 잘 살고 있어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엄마를 떠올리니 점수나 심사평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바쁜 강의 일정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나 자신에게 ‘합격’을 주기로 했다.
끝나고 나서야 선배 언니가 챙겨준 꽃다발과 편지, 비타민에 담긴 응원이 마음속 깊이 들려왔다.
오디션을 마치기까지 많은 분들께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받았구나 싶어서 뭉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