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이야기
스탠드의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어둑신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혀 주었다. 노트를 펼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 줄을 끄적였으나 이내 쓰고 싶은 문장은 머릿속을 맴돌 뿐 잘 떠오르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애꿎은 만년필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내가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펜이다. 펜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주로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하기에 필기감이 좋은 것을 선호하곤 했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는 노트에 펜으로 초고를 완성하고 컴퓨터에 옮기며 수정해서 원고를 완성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노트북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해지면서 점점 손 글씨를 쓰는 일이 줄어들었다. 나조차도 내 글씨체가 낯설어질 지경이다. 느슨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에 단 몇 줄이라도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기위해서 매일 펜을 잡고자 노력한다.
펜을 좋아하다보니 최근에 가죽으로 된 펜 파우치를 구입했다. 칸칸이 꽂아 놓으면 펜 고유의 개성 있는 디자인이 돋보여서 보기 좋다. 그날의 기분에 맞춰 펜을 골라 쓴다. 일기를 쓰거나 여행지에서 글을 쓸 때는 역시 만년필만한 것이 없다. 여행 가방을 꾸릴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만년필과 노트이다. 또한 여행지에서는 문구점에 들러 특색 있는 노트와 필기구를 나에게 선물하곤 한다.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호텔에서 피곤함마저 달콤한 시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종이에 잉크가 퍼져가는 만년필의 감촉은 감성을 서서히 일깨워준다. 펜촉의 두께, 잉크, 종이 질 등에 따라 모양도 글씨 번짐도 달라지는 만년필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아날로그의 매력이 넘치는 필기구다.
만년필의 원이름은 ‘fountain pen’이다. ‘잉크가 영원히 넘쳐나다’를 시적인 표현으로 ‘샘처럼 솟아오르다’라고 표현하여 ‘샘’ 또는 ‘분수’의 뜻을 지닌 ‘fountain’과 ‘pen’이 합쳐져‘fountain pen’이라는 새로운 고유명사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유명한 작가들과 인연이 깊은 존재인 만년필은 그들의 손에 의해 ‘창작의 도구’가 되어왔다. 내 손에 쥐어진 펜도 작가들처럼 술술 써 내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오가와 이토가 쓴 <츠바키 문구점>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름다운 손 편지로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해주는 대필가 포포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의뢰인이 찾아오면 포포는 그들에게 의자를 내어주고 맛있는 차를 대접하며 털어놓는 사연을 경청한다. 포포가 편지를 쓰는 과정은 깜짝 놀랄 만하다. 상대의 기분, 의뢰인의 성별과 성격, 의뢰받은 내용에 따라 모든 요소를 세심하게 살핀다. 성별에 따른 필체와 어투는 물론이고, 어떤 필기구를 쓸 것인지, 편지지와 편지봉투의 지종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잉크 색깔, 우표모양, 밀봉 방식까지 정성을 들인다. 그의 마음과 몸이 되어 최적의 언어를 고르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글을 쓸 때의 마음가짐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내가 대필가라면 의뢰인에 맞게 어떤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대필가 포포는 지나간 첫사랑에게 보내는 안부편지를 의뢰인의 투명하고도 선한 마음이 전해지도록 유리펜을 사용했다. 날카롭고 뾰족한 펜 끝이 삭삭하고 독특한 소리로 속삭인다니 써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시대에는 사라져버린 직업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시골 문구점에서 주인공처럼 대필가로 살아보는 것도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듯하다.
쓴다는 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행위는 마지막에 쓰는 것으로 귀결된다. 슬프거나 적막할 때 혹은 행복할 때도 난 늘 쓰고 있다. 쓴다는 것은 생각과 감정들을 다듬으면서 나를 뒤돌아보는 시간이다. 지나간 일, 그 당시는 몰랐던 안개같이 모호한 마음도 정리하고 이해하며 나를 다독여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를 표현하고 존재감을 느끼는 글쓰기는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는 행위인 것이다. 때문에 쓰는 도구 역시 친근한 존재다.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펜은 등단할 때, 남편이 영문이름의 각인을 새겨 선물한 검정색 만년필이다.
만년필은 원래 자주 사용해야 좋은 펜 감촉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펜에 비해 부지런히 쓰는 것이 잘 관리하는 방법이다. 자주 쓰지 않으면 잉크가 굳어 나오지 않는 단점 때문에 불편하다. 게으름을 피워 글씨가 써지지 않을 때면 몽땅 분해해 청소하거나 따뜻한 물에 담가 굳은 잉크를 녹여주어야 한다. 특유의 진한 잉크 냄새는 학창 시절 펜촉에 묻혀 필기하던 수업시간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온다. 편지로 마음을 나누던 친구들도 그리워진다. 만년필의 잉크가 굳지 않도록 내안의 문장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