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만날 때

나와 그림자

by 해은

그림자가 나를 따라왔다. 배롱나무로 이어진 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나무 가지의 그림자 사이로 따라오는 것은 내 그림자였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오전의 햇빛에 비친 나는 키가 작고 어깨가 처진 것이 지쳐 보였다. 내 그림자를 눈여겨본 것은 얼마만인가. 언제 보았던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 발 끝에 항상 붙어 다니는데도 한동안 의식하지 못했다. 무엇이 그리 바쁘다고 그림자를 보지 못하고 살았을까. 한동안 타인의 그림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따뜻한 그림자, 당당하고 편안해 보이는 그림자들. 홀로 앉아 있던 내 마음에 드리워지던 그림자는 불안이나 슬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걷던 남편은 나무의 그림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심전심이라고 그도 그림자에 꽂혔나보다. 그는 요즘 오래된 카메라로 흑백 필름 사진을 주로 찍고 있다. 사진은 빛 없이는 찍을 수 없으며 빛과 그림자의 그림이 전부인 셈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컬러풀한 서양화라면 그림자는 농담이 표현된 수묵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빛’이라는 폴더에 그림자의 사진을 계속 모으고 있다. 그가 그림자를 찍는 이유를 물어 보았다. 세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모순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한다고 그는 답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함께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표현할 때 세상의 본모습에 조금 더 가까워 지는듯해서 그림자를 찍는다고 한다. 색이 사라진 세상에서 빛과 그림자는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미셀 투르니에는 그림자를“삶의 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간다. 어린아이는 뜨는 해를 등지고 걷는다. 몸집이 작은데도 큼직한 그림자가 앞서가고 있다. 그것이 그의 미래이다... 그러나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고 성숙한 인간에게는 등 뒤에 그림자가 생겨나서 점점 길어진다. 이제부터 그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추억들의 무게를 발뒤축에 끌고 다닌다. 그가 사랑했다가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에 보태지는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배롱나무 가지 위에 만개한 붉은 꽃들의 그림자도, 그저 가늘거나 굵직한 검은 선과 얼룩처럼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화려한 절정의 때가 지나면 나타날 그 이면의 모습을 벌써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여름의 은성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보다.

벌레처럼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빛 속에 있으면 모두 그림자를 만든다. 눈여겨봐야 하는 그 작은 그림자는 이처럼 환한 세상에 숱한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하고 일깨운다. 설령 아주 컴컴한 곳이라도 한 줄기 빛이 비춘다면 사물들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림자는 대개 물체에 종속된 개념으로 이해되기 쉽다. 물체의 움직임이 그림자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분신이라는 의미가 있다. 발에서 떨어지지 않고 항상 붙어 있어 구속, 속박의 이미지도 있다. 심리학에서는 마음의 어두운 부분들을 나타낸다. 무의식의 저 밑에 있는 내 그림자는 어떤 모습인지. 억눌린 그림자를 숨기기보다는 꺼내고 표현하는 것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이지 않을까.

그림자를 만나는 시간은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다가 어느 날 혼자 천천히 걷다 보니 발끝에 밟히는 내 그림자. 바쁠 때는 눈여겨 볼 새가 없다가 축 처진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내 그림자를 다시 만난다.


나는 내 그림자를 일으켜 세우고 걸어간다. 그림자의 처진 어깨가 곧게 펴지고 내딛는 발걸음은 씩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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