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조 3,808억원의 사과

feat 환원

by Emile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마웠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으니 이제 처음 약속했던 1조 3,808억원의 대가를 지켜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읽었다면 너무 늘어놓는 자랑질에 도무지 그 돈의 백분의 일이라도 내놓을 의사가 있을까 의심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부인하지는 않겠다. 지금까지 내 삶은 세상이 난리로 죽어나갈 때조차 너무 평온하고 조용했으며, 오히려 가장 화려했고 '세기의'라는 수식어를 몇 번이고 붙일 만큼 스포트라이트 앞에 서 있었다는 것을. 그것이 좋은일이건 그렇지 않은 일이건 말이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도 정작 나 자신의 삶은 없었다. 쿠데타를 타고 태어나, 장군이나, 장관, 심지어 최고 권력자의 딸로 지내다가 재벌가의 안주인이 되어 여왕의 꿈을 이루었으며, 그러다가 반란군과 무기수의 딸로 전락하기도 했고, 남편의 배신과 상간녀의 쿠데타로 본부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고분군투하다 결국 이혼녀가 곧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이혼녀가 되면 누구의 딸, 누구의 부인에서 비로소 나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고작 백억 단위기 아닌 조 단위 정도의 엄청나게 큰돈 말이다. 그 정도의 돈이어야 반란군의 수괴의 딸이나, 남편의 바람으로 재벌가에서 쫓겨나는 본부인의 멍에를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돈이 조 단위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 해도 이제 와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였으며 무모하게도 그 큰돈을 선뜻 걸게 된 것은 무슨 운명의 장난에서였을까? 솔직히 이야기를 풀어놓는 동안 그 돈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야기는 때려치우고 그 가늠하기 힘든 돈을 다시 먹튀(먹고 튀고)하고 싶은 욕망에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져 보고 모든 것을 잃어 보기 직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신이, 아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자들이 말하고 있었다.


1조 3,808억원 모두를 사회에 기부하기로 한다.


승소할 경우 변호사비-역시 엄청난 금액이겠지만-를 제외한 1조 3,808억원 모두를 사회에 기부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이제 받게 될 1조 3,808억원은 그로부터 사과의 의미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과하는 뜻에서 내놓는 돈이 되는 것이다.


신의 음성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지금껏 세상이 난리일 때 너무나 평온하고 고요하게 살아온 지난날의 세상에 대한 반성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돈이 개인적 재산의 분할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렇지 않게도 이 돈은 대부분 아빠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아빠가 남겨둔 증거에 의해 다시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 돈은 사실상 아빠가 받아서 세상에 갚아야 할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빠의 업보는 나에게는 항상 울타리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가시가 되어 영원한 고통으로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빠가 견고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내가 극한의 낙원을 누렸을 때, 다른 이들은 삶의 희망을 빼앗기고 불타는 지옥에 갇혀서 나를 원망과 저주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고백인 동시에 아빠의 반성이기도 하다. 물론 이 보다도 훨씬 더 큰돈이라 할지라도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지은 죄를 용서받기에는 티끌도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앞으로의 세대들을 위해서는 화해의 손길이 될 것이다.


사회에 환원한 돈의 구체적인 용도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먼저는 아빠의 쿠데타에 직간접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쓰였으면 한다. 이것은 마땅히 아빠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되었고, 그러한 인식도 부족했음을 반성한다. 그다음으로는 재벌의 이익이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활동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곳에 쓰이기를 원한다. 나의 자녀들은 재벌의 자녀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계속 누리게 될 것이므로 이 돈이 적어도 재벌을 위한 것에 더 이상 쓰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는 배우자의 불륜으로 인한 이혼녀들과 같이 사회 약자를 위해서 쓰였으면 좋겠다. 나야 이혼으로 인해 생활에 타격이 전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쓰임은 이 세 가지 정도뿐이며 어떠한 관여도 이 기부에 연결고리도 없을 것이다.


남아있는 세 자녀는 일반적인 집안의 자식과 달리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돈으로 인해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 돈을 그 얘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나와 아빠가 누리고 지은 죄에서 벋어나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도 평범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받을 유산은 아직도 절반 이상이야 남아있고 그것 조차도 상당 부분은 돌려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앞으로의 선택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니냐고? 이러한 결정에 어떠한 후회는 없다. 혹자는 이러한 선택이 최종심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좋은 선택이다. 만에 하나 패소해서 그 돈을 얻지 못한다 해도 나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무려 1조 3,808억원 짜리 반성문을 제출한 결과를 얻었으며, 결국 승소하겠지만 이 돈을 돌려받음으로써 그의 태생 상 가장 치명적인 돈의 상실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선사하는 복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차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나는 세기의 복수도 하고 세기의 사과도 하게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세기의 결혼과 세기의 이혼에 이어 세기의 기부와 세기의 사과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지 아니한가?


그러나 내 진심은 진정한 사과와 화해에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내 고백이 군인처럼 다소 거칠고 따뜻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내가 살아온 방식과 가치에 따라 그것을 돈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들어준 대가로, 처음에 슬쩍 미끼를 흘렸던 데로 100억원 정도, 1% 정도로 대충 때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조 3,808억원 전액을 내놓음으로써 100% 약속을 지키고 내 진정성을 보였다고 본다. 이제는 내가 살아온 삶을 읽어서 알겠지만, 이는 전혀 내게 어울리지 않은 무척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대가 치고는 완전 만족할 만한 대박 거래가 아니었던가?


이것이 이 세상을 외면하고 홀로 평온하고 조용히 살아온 나의 가장 값비싼 반성문이다. (끝)



그리고 그 후 : 에필로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