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은 식탁의자에 앉아 바라지가 한 말을 떠올렸다.
“물이 아니라, 뭍입니다.”
한마디로 린이 땅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었다.
성문은 고개를 돌려 안방에서 자고 있는 윤수를 바라보았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성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받았습니다.”
-윤수 아버님. 접니다.
“아, 박사님.”
성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재학 박사였다.
-병원에 전화하셨다면서요? 무슨 일인가요?
“윤수가 환시를 보는 거 같습니다.”
-또 다혜가 나타나는 건가요?
“네? 다혜요?”
일순간 성문의 얼굴이 굳었다. 윤수가 환시를 보는 소녀의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박사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윤수가 병원에서 환시를 볼 때도 다혜라는 아이를 흉내 내고 그랬습니까?”
-저는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간호사 말로는 그런 적이 몇 번 있다더군요. 윤수가 여자 목소리를 내면서 둘이 대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했어요.
“이유가 뭡니까? 왜 그런 증상이 생기는 겁니까?”
-환시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자신이요?”
-네, 누군가가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하니까,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가상의 인물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환시를 보는 거죠.
성문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수가 언제부터 환시를 보기 시작했죠?
“어제부터 환시가 일어났는데, 약을 먹고 나서도 환시와 대화를 하더군요. 이건 왜 그런 겁니까?”
도재학이 끄응 거리는 소리를 내고는 입을 열었다.
-그 약도 센 편인데... 약이 듣지 않는다는 건, 외상 후 스트레스가 병원에 있을 때도다 더 심하다는 뜻입니다. 최근에 윤수가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나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아 성문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었다.
-우선 제가 지어준 약을 윤수에게 계속 먹이세요. 차도가 생기지 않는다면 다시 입원해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경과를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성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윤수가 환시를 보고, 약도 들지 않는 건, 아내가 죽었을 때 보다 더 큰 스트레스에 노출됐기 때문이라는 결론이었다.
성문은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박중구에게는 죽을 뻔하고, 심지어 린까지 죽었다. 멀쩡한 게 되려 이상한 것이었다.
성문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윤수에게 돌렸다. 동시에 그의 눈이 커졌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자고 있던 윤수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성문은 재빨리 안방에 들어갔다.
“지윤수!”
다시 거실로 나와 윤수를 찾았다. 전화를 할 때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현관문이 열린 적도 없었다. 창문도 다 닫혀 있는 상태다.
그런데 어디에?
성문은 다시 안방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발칵 장롱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윤수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너 여기서 뭐해?”
“저 어떻게 찾았어요?”
“뭐?”
“윤수가 찾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찾았네.”
성문은 소름이 끼쳤다. 용언 폭포에서는 린에게 빙의된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지금은 또 환시 목소리를 냈다.
“안 되겠다. 병원에 가자.”
성문이 윤수 팔목을 잡고 끌어내려할 때였다.
“아빠 왜 그래요.”
윤수가 팔을 내빼며 저항을 했다. 성문은 손을 놓은 뒤 입을 뗐다.
“너 이 장롱 속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나?‘
“다혜가, 여기에 숨어 있길래 나오라고 한 기억밖에...”
성문은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단 거기서 나와 봐. 아빠랑 얘기 좀 하자.”
“네.”
윤수가 장롱 속을 기어 나왔다.
***
성문은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상태가 죽게 된 경위부터 물어야 할지, 오늘 무당이 굿을 할 때 있었던 이야기를 물어야 할지, 아니면 환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 첩첩산중이었다.
성문은 고민 끝에 윤수의 병에 관해 확실히 설명해 주기로 했다. 자기 병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어야, 스스로 대처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아까 도재학 박사님이랑 통화를 했다. 네가 환시를 본다고 이야기했어.”
윤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박사님 말로는 다혜라는 그 여자아이 말이다. 네가 무의식으로 만들어낸 존재라고 하더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알고 있었던 거야?”
“박사님한테 병원에서 설명을 듣기도 했고... 그전부터 저랑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알고 있었다니 다행이구나.”
성문은 윤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한테 기대려는 마음을 갖지 마. 그러면 그럴수록 계속 네 앞에 나타날 거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건 힘들 걸요 아빠?”
윤수가 성문을 쳐다며 말을 이었다.
“아빠는 더는 윤수의 대화 상대가 아니에요. 그걸 아셔야 해요.”
성문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말하는 사람은 윤수였지만, 본체는 윤수가 아니라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빠라니.
성문은 메마른 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앞으로 윤수가 내게 기댈 수 있도록 신경 쓸 거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해.”
“이미 늦었어요. 살인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빠가 아니라 저니까요.”
성문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네가 살인을 막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던 윤수의 웃음기가 가셨다.
“아빠, 또 다혜가 왔다 갔어요..”
“안다. 방금 나랑 이야기했어.”
“아빠랑요?”
“그래.”
윤수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데 윤수야.”
성문이 한 박자 쉰 뒤 입을 뗐다.
“그 아이 이름이 왜 다혜 인지는 알아? 걔가 스스로 그렇게 말한 거야?”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윤수는 완전히 모르는 눈치였다. 성문은 윤수를 쳐다보며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설마 윤수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나도, 소영도 그 사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성문은 생각을 정리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 뚜껑을 따 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윤수에게도 물을 따라줬다. 자리에 앉아 윤수에게 물었다.
“윤수야 아까 용언 폭포에서 굿 할 때 기억 나?”
“하나도요.”
윤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문은 굿을 할 때 있었던 자극적은 이야기는 모두 빼기로 했다.
“무속인이 그러는데, 린을 찾지 않으면 마을에 계속 사람이 죽어나갈 거라고 그러더구나.”
“큰일이네요..”
“그리고 또 이상한 말을 했는데, 린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물이 아니라 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
“뭍이요?”
“그래, 우리 마을 어딘가 땅에 있다는 뜻이야.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니?”
윤수는 생각에 잠긴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린이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지금부터 조사를 해보려고. 아빠 좀 도와줄 수 있어?”
“어떻게요?”
“오늘 저녁에 린의 집으로 가보자.”
윤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윤수를 혼자 놔두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고, 린과 가장 가까운 사이니 혹시라도 단서를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윤수를 곁에서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알았어요. 갈게요.”
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 5시가 되자 해가 저물었다. 성문은 창밖을 내다본 뒤 윤수에게 말했다.
“저녁 먹고 바로 가자꾸나. 해가 떨어지면 경찰들도 철수할 거야.”
“네.”
성문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깻잎과 멸치조림, 진미채였다. 모두 얼마 전에 반찬용으로 만들어진 걸 사 온 것이었다. 따로 국을 만들거나 새로운 요리는 하지 않았다. 성문은 윤수가 입맛이 없다는 걸 알고 반공기만 퍼주었다. 윤수는 그 반공기에서 또 반을 남겼다. 입맛이 없기는 성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꾸역꾸역 입안에 밥을 넣었다.
문득 아내인 소영의 잔소리가 생각났다. 성문이 범인을 검거하느라 몇 날 며칠을 밤새고 피곤에 절어 집에 들어올 때였다. 소영은 임신한 몸으로 꼭 밥 먹고 자게 만들었다. 입맛이 없다고 해도 식탁 앞에 앉히고서는 억지로 밥을 먹게 했다. 자고 있던 중 갑자기 사건이 터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밥시간 때만 되면 그녀는 성문을 붙잡곤 한 숟갈이라도 먹였다. 그 한 숟가락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어느 날부터 김밥을 미리 싸두기 시작했다. 성문이 세상모르고 자다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뛰쳐나가면 소영은 배달원처럼 김밥이 담긴 봉지를 성문의 손목에 재빨리 걸었다.
그래서일까? 성문은 형사 생황이 참 고달프다고 생각은 했지만, 배고픈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박봉에 아침저녁도 없이 출동을 했지만, 소영과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한 번도 허기가 진다거나 잠복근무 중 먹을 게 없나 찾아본 적이 없었다.
소영은 꼭 김밥을 다섯 줄을 쌌는데, 정신없이 수사를 하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면, 꼭 김밥 한 줄은 남았다. 소영은 왜 한 줄은 먹지 않냐며 잔소리를 했지만, 한 번도 그 한 줄 때문에 네 줄을 싸준 적은 없었다. 성문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왜 꼭 김밥 한 줄이 남는 건지 의아했다. 특별히 의식한 적은 없었는데, 꼭 한 줄이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문은 집으로 들어가던 중 이번에도 김밥 한 줄이 남자 주어진 미션을 클리어하는 기분으로 남은 한 줄을 먹어치웠다. 시간이 오래돼 좀 쉰내가 났지만 먹을 만했다. 김밥을 위장에 넣은 뒤, 성문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빈 봉지를 보여주며 오늘은 드디어 다 먹었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소영이 거실에 쓰러진 채로 엎드려 있었다.
“왜 그래 소영아?”
“오빠... 배가..배가...”
소영의 치맛자락 아래서 양수가 터져 흐르고 있었다. 출산일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애가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소영은 쌍둥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성문은 소용을 들춰 업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응급실에 접수를 하자 간호사가 바로 출산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왕절개 수술이 필요할 수 있으니 사인을 하라고 말했다.
성문은 정신없이 서류에 사인을 했다. 대기실에 앉아 부디 출산이든 수술이든 잘 되길 빌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게 김밥 한 줄, 윤수였고, 사라진 나머지 한 줄은 다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