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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한끼 Sep 15. 2024

싱글맘의 명절

이혼 후 명절 일상

결혼하면서 명절은 더 이상 휴일이 아니었다.


제사음식을 종일 만들고 설거지 뒷정리 등 고단한 노동이 기다리는 날이었다. 제수비용을 보내드리고 아이들 새 옷도 사입히고 명절 선물도 구입하고 거기다 조카들 용돈까지 두둑이 챙겨야 해서 명절비 예산도 많이 준비해야 했고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나날이었다.


며칠 동안 푹 쉬며 친구들 만나 놀던 결혼 전의 명절 일상은 금세 잊게 되었다.


꼬박 15년이었다.

그렇게 명절을 보낸 게..


피곤해도 부담되어도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결혼과 동시에 시집을 가면 여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 여겼다. 그렇게 싹싹한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도리는 하려고 애썼다.



이혼 후 싱글맘이 된 지금,

명절은 다시 자유로워졌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혼하고 공시공부를 하던 때는 명절이 너무나도 싫었다.  친정에 가면 여러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대책 없이 이혼은 왜 해서... 혹시 도와달라 하진 않겠지? 실패자를 보는 듯한 눈빛을 받거나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힘든 모습을 보이는 건 더 싫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격지심에 더 예민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공시공부를 하는 2년간은 친정에 가기 싫어서 몸부림을 쳤던 것 같다. 그래도 꾸역꾸역 갔던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이 또래 사촌들이 많아 명절 때가 되면 모이는 걸 좋아했다.  용돈을 두둑이 받는 것도 좋아했고 함께 자고 함께 번화가로 놀러 나가는 것도 신나 했다.  아이들만 생각하며 그렇게 참석은 억지로 했다.


그렇게 싫었던 명절이, 공무원 합격과 동시에 괜찮아졌다.  

친정사람들은 이제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실상 별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리고 명절이 되면 더 혼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이들이 아빠를 만나러 가는 날엔 혼자 집에 남아있는 것이 어색했다.  가족들 북적대며 시가로 향하는 그 평범한 일정이 잠시 부럽기도 했다.  다시 제사음식을 만들어 아이들 입에 새우튀김 넣어주거나 오랜만에 친지들 만나 인사하며 안부 묻던 그 소속감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혼자 덩그러니 남아 식사를 대충 챙겨 먹는 내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까운 카페에 가서 혼자 앉아있고 싶지도 않았다. 잠을 자든 영화를 보든 뭘 하든 명절날 혼자서 뭔갈 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고 싶지 않았다.


낯선 변화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이혼 4년 차.. 명절일상은 달라졌다.


명절 중 하루는 친정모임을 간다.  얼마 전부터 친정모임을 식당에서 하는데  아이들과 가서 밥 한 끼 맛있게 먹고 용돈을 서로 주고받고 헤어진다.

그리고 또 하루는, 아이들은 아빠를 보러 간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용돈도 두둑이 받으니 아이들이 좋아한다.

아이들이 아빠를 만나러 가는 날은 나는 지인 또는 친구를 만나 저녁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리고 또 하루는 아이들과 보통 영화를 보러 갔다.  팝콘도 사고 간단히 쇼핑도 한다.



명절연휴 요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  미리 간식거리와 밀키트를 잔뜩 주문하고 배달음식을 먹기도 한다.


이제 결혼 전처럼 명절이 휴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결혼생활을 할 때는 몰랐었던 그 실체가 이제야 보인다.


당연하게 느껴졌던 며느리, 아내의 의무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시댁어른들은 고맙다고 하지 않았을까?

애들 아빠나... 시누는 본인 아버지 제사상인데도 제수음식 만드는 데 하나 거들지도 않고

방에서 차례상을 받기만 하고 술 마시고 놀기만 했을까?

그걸 왜 다들 당연하게 여겼을까?

차례상을 지내고 친정에 가고 싶어도 왜 눈치를 보며 말을 제대로 못 했을까?

제수음식 만드는 것도 모자라 어린 조카들과 아이들 돌보는 것도

왜 며느리인 내가 해야 하는 것처럼 그랬을까?

그러면서도 왜 더 해주기를 바라고 바라는 것이 많았을까?

도대체 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빚이 있나?

그저 결혼만 했을 뿐인데...,


시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애들 아빠는 자주 말했었다.

"너는 다른 집보다는 훨씬 편하니 복 받은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수긍을 했던 나는 바보였던가?

대한민국 한 시대를 살며 자연스럽게 가스라이팅 당했던 건 아닐까?


이제야 나는 자유를 누린다.

자유는 때론 외롭지만 그만큼 즐거움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날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멍하니 보내는 것도 소중하고 좋다.


이번 연휴기간은 꽤 길어서

아이들과 맛있는 거 먹으며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나에게 이제 명절은 진정한 빨간날(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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