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 진심
「내가 너무 자주 와서 싫증 나면 어떡하죠?」
진희의 젖은 목소리가 재원을 현실로 데려다주었다. 진희가 재원을 세게 안으며 눈물을 닦았다. 재원은 그녀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모든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걸 읽을 수 있다는 게 어떨 때는 고통일 때도 있다. 재원은 그녀의 불안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만큼 불안한 그 마음을. 재원이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 진희를 보면서 자신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들 때문에 재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이 메어왔다.
‘이제는 네가 없는 집에 들어오면 무언가 허전해.’ 진희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닦았던 눈물을 도로 내뱉었다. 재원은 천천히 진희의 입술을 찾아 더듬었다. 진희는 언제든지 재원이 원하면 그를 받아들였다. 가끔은 그녀가 더 그를 찾았다. 그의 뜨거워지는 몸, 거친 숨결, 젖은 머리카락,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식어가는 그의 체온이 진희를 뜨겁게 만들었다.
눈을 뜬 건 진희였다. 재원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시계는 자정 근처를 맴돌았다. 진희는 서둘러 집에 돌아가야만 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코까지 작게 골고 있는 재원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진희는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간단하게 화장을 마쳤다. 재원의 집에는 어느새, 그녀의 화장품들이 조그맣게 한쪽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갑을 열어 돈을 확인해 보았다.
재원의 집에 오기 전에 슈퍼에 다녀와서 인지 택시요금으로는 조금 불안한 돈이 지갑 안에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택시비를 꺼내려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재원의 지갑을 열었다. 처음이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그의 지갑 한쪽엔 얼마의 현금과 두 개의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자동차운전면허증, 다른 한쪽엔 가족사진이 얌전히 들어 있었다. 한껏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억지로 만든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그 사진을 보며 진희도 조용히 따라 웃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학원을 경영하신다는 것 외에는 그의 부모님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연애하는 일 년 남짓 괴로운 과거사를 떠올리게 하는 가족 이야기나 본인 이야기를 거의 묻지 못했었다.
진희가 ‘언제 한 번 날을 잡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봐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족사진 뒤쪽으로 누군가의 사진이 한 장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자였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을 가지고 만개한 백합처럼 웃고 있는 모습이 예쁘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들이 어느 공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 속의 여동생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진희는 놀라서 잠들어 있는 재원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준 사진은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서 알 수 없는 여자의 사진을 가족사진과 포개어 함께 지니고 다닌다는 것은 납득할 수도 없었으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계를 한 번 더 본 진희는 만원을 꺼내고 작은 메모지에 돈을 꺼냈다고 적은 다음 재원의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내내 그 여자만을 떠올렸다. 자신과 만나기 전에 사귀던 여자일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과의 연애 중에도 그녀의 사진을 버리지 않은 걸까. 단지 무관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버리지 않은 게 아닐 것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채로 집에 돌아온 진희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화장을 지우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미안해. 깜빡 잠이 들었나 봐」
「괜찮아요. 많이 피곤해 보여 깨우지 않았어요!」
「다음부턴 꼭 깨워. 집이니?」
「네… 택시 타고 와서 방금 누웠어요」
「알았어. 미안해……」
「저… 」
진희는 망설이고 있었다.
「뭐, 할 말 있어?」
「아니에요. 잘 자요……」
「그래. 잘 자. 언젠가는 당신을 위해 당신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날들도 오겠지……」
진희는 그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막혔다. 그의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사라졌다.
사진 속의 그 여자, 질투심일까. 아니면, 단지 그의 무관심일까. 진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화를 걸어 그녀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 여자 사진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재원이 찢어버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싫었다. 그녀의 이름을 그가 부르는 것조차 싫었다. 재원은 자신의 남자였다. 그에게 그 어떤 이유나 변명도 듣기 싫었다. 자신이 재원만을 위해 존재하듯 그도 자신만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밤새 뒤척이며 아침을 맞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학원에 전화를 걸어 월차를 냈다. 그가 출근하기 전에 그의 집에 가고 싶었지만 화장을 하려고 거울 앞에 앉았을 때, 그녀의 얼굴은 너무 많이 부어있었다. 이런 얼굴로 그를 찾아가는 건 싫었다. 진희는 결국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고,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그의 집에 도착했다.
이제 그가 오려면 베란다 가운데에 떠있는 태양이 서쪽 끝에 닿아야 할 만큼의 시간이 남았다. 재원이 없는 그의 집, 아직도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침대, 방안 한가득 그만의 향기, 진희는 재원의 책장과 서랍을 열었다. 무언가를 특별히 찾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크게 별다른 것도 있지 않았다. 그가 공부했던 책들, 학교에서 가르칠 교제에 대한 자료들, 밀린 빨래들이 전부였다.
그러다 문득, 서랍 한구석에서 작은 꾸러미를 발견했다. 그 옆에 놓여 있던 반지 케이스도 함께. 진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반지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거기엔 자신이 끼고 있는 진주반지와 비슷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작게 진희의 손이 떨렸다. 얼른 반지 케이스를 닫았다. 꾸러미도, 반지 케이스도 깊이 감추어져 있지도 않고, 아주 쉽게 꺼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꾸러미를 펼쳐 보았다. 그곳엔 자신의 남자와 지갑 속의 그녀가 함께 찍은 사진들과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아무 곳에나 놓여있었지만 절대 누구라도 만지면 안 될 것처럼 소중하게 봉인된 채로 그때의 시간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술집에서 함께 다정하게 찍은 사진, 겨울 바다인지 코트를 입고 바닷가에 나란히 누워서 찍은 사진들, 재원이 그녀를 위해서 노랑 냄비에 라면을 끓이는 모습, 초점은 나가 있었지만 행복은 그 안에 무엇보다 반짝반짝,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조금은 어두운(아마도 그가 예전에 살았던 방이었던 것 같은) 곳에서 사진 속의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자고 있는 모습까지도 모든 것이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가 보낸 편지들, 심지어는 그녀가 작은 종이에 적어준 쪽지까지도 비밀스럽게 티끌하나 묻지 않은 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왜 버리지 않았을까. 사진 속의 저 여자와 재원은 잤을까. 진희는 유치하지만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잔해를 보면서 그런 생각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재원의 첫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희는 재원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다른 여자와 잤다는 이유로 재원이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났다. 그 많은 편지들과 쪽지들은 한 여자에게서만 온 것이었다. 정 윤 희.
왜 이렇게 서러운지, 왜 재원은 정윤희에 대한 추억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는지, 진희는 정윤희가 보낸 편지들과 쪽지들을 하나씩 하나씩 모조리 다 읽어 버렸다. 배고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진희는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윤희라는 여자보다는 재원이 더 그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언제 집에 들어왔는지, 언제 퇴근시간이 지나버렸는지, 편지들 사이에서 울고 있는 진희 앞에 재원이 서 있었다. 진희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식어버린 커피처럼 검게 굳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