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속의 달
강릉 경포에는 세 개의 달이 뜬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경포호수의 달,
경포해변의 달,
술잔 속에 비친 달이 그것이다.
나는 그중 하나인 잔 속의 달을 이야기하려 한다.
작년 이맘때쯤이다. 동두천에 새로운 삶의 터 를 마련한 친구가 있다.
친구는 마당에 넓은 닭장을 만들어놓고, 여러 종류의 닭들을 키웠다. 그 중 하얀색 닭은 특히 우아하고 지도력이 있어서 대장이라고 불렀다. 친구는 그 닭들에게 알을 낳은 보답으로 모이를 주었다.
친구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닭장부터 점검하고 밤새 잘 잤는지 별일 없었는지 살펴본 후 닭장 문을 활짝~열어 준다. 그래서인지 요 녀석들은 마당과 뒤뜰을 마음껏 배회하며 자유롭게 다닌다. 그 자유로움 속에도 왠지 모를 질서 정연 함이 살아있다.
얼마 전 친구들 모임을 이곳에서 한 적이 있었다. 친구가 요즈음 닭들이 계속 한, 두 개씩 알을 낳기 시작했다면서, 다른 친구들 몰래 나에게만 초란 5알을 손에 쥐어 주었다. 어렵게 구한 귀한 것을 주는 것처럼 친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엄지 척하면서 ”아침에 남편에게 노른자만 들기름 부어서 줘봐 대접받는 듯 좋아하실 거야~“ 하며 친구는 오히려 많이 주지 못함을 미안해했다. 나에게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말이다.
초란의 효능을 말하자면 기혈의 흐름을 도와 혈액순환에도 좋을 뿐 아니라, 고칼슘이라 관절염에도 좋고, 10가지 아미노산의 작용이 혈관장애도 막아줄 만큼 보약이 따로 없을 정도라 한다. 그래서 초유도 갓난아이에게는 꼭 먹이라고 했다. 모든 영양소가 다 들어있어서 면역력에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아침 나는 친구가 알려준 데로 소주잔에 노른자만 골라 들기름 부어서 남편에게 주었다. 남편의 목을 통과하면서 꿀꺽~ 넘어갈 때 달 하나를 삼키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쌍화차를 즐겨 마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추운 겨울날 아버지는 온몸이 으스스하고 감기 기운이 있다 싶으면 동네 근처 다방으로 가서 립스틱 짙게 바른 아줌마에게 쌍화차에 달걀노른자를 동동 띄워 달라고 주문하신다.
커피잔 보다 더 큰 찻잔에 쌍화차가 넘칠 정도로 가득 부어 갖가지 견과류와 함께 시커먼 쌍화차 중앙에는 노른자 하나가 떡하니 달처럼 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쌍화차가 나오면 티스푼으로 노른자가 터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건져내어 입안에 쏙~ 넣어 드시던 아버지.
가끔 나도 추운 날, 감기가 온다 싶으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방으로 가서 쌍화차를 사주셨다. 처음 먹어본 쌍화차는 한약처럼 쓴맛이 강했다. 나는 쌍화차와 계란 노른자보다는 잔 속에 들어있는 고소한 견과류를 건져 먹는 재미가 더 솔솔했다. 신기하게도 쌍화차를 마시고 나면 온몸이 따뜻해지며 배속까지 든든해졌다.
먹고살기 힘들 때 계란 노른자는 우리의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 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추운 겨울날, 뜨거운 쌍화차를 호호 불며 마시던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대변해 주듯 굴곡진 모습이 지금도 내 눈앞에 생생하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친구가 준 초란으로 쌍화차를 만들어 드리고 싶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쌍화차 잔 속에 뜨는 노란 달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아버지, 제가 쌍화차 한잔 사드릴게예~ 다방으로 가입시더"
하면 아버지는 분명히 좋아하실 텐데...
이제는 내가 아버지에게 매일 쌍화차를 사 드릴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는 아버지가 없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