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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Sep 08. 2024

남자친구와 사상/성향이 다를 때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무언가를 취하고 포기하기를 되풀이합니다. 저는 혼자 여행하기를 참 좋아합니다. 어제 제 친구가 다시 베트남 푸꾸옥에 놀러 가자며 이야기꽃을 피웠을 때 저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약간의 불안과 동반되는 완벽한 자유를 느끼고 싶을 땐 나 홀로 여행이 좋습니다. 자신이 하고픈 일을 여건이 닿는 한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하면 조금 더 안전할 수는 있지만 자유와 원하는 계획을 어느 정도 취하고,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겠지요. 사랑도 여행과 같지 않을까요? 예전 글에도 썼듯이 자기 입맛에 맞는 완벽한 맞춤 정장 연인은 없습니다. 기성복을 고르고 다른 불편한 부분은 감수해야지요.


<더 커뮤니티 사상 검증 테스트>를 아시는지요? 요즘 공휴일을 기념하기 위해, 회사 홍보를 위해 등 다양한 이유로 모바일 심리 테스트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지만 사상 검증 테스트는 조금 더 질문이 날카롭습니다. 이름 그대로 사상을 검증하는 테스트인데 정치, 젠더, 계급, 사회 윤리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자기 생각을 답하게 합니다. 자세히 파고들면 '여성이 남성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다고 생각한다', 'PC주의(인종, 성별, 종교, 성적 지향 등에서 편견이 섞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세상을 추구하는 이념)를 옳다고 생각한다'와 같은 사상을 파헤치는 질문이 꽤 길게 쏟아집니다.

저는 <더 커뮤니티 사상 검증 테스트>의 결과 캡처 화면을 휴대폰에 꼭꼭 숨겨두었습니다. 질문 중 몇 가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정확하지 않은 결과이기에... 는 부차적인 이유고, 제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괜히 MBTI를 얘기했다가 MBTI에 규정된 특징대로 제가 알려져서 언짢았던 기분을 또 느끼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다릅니다. 브런치 북 이름에 'INFJ'를 걸고 쓸 만큼 MBTI든, 뭐든 나 자신을 숨김 없이 순수하고 투명하게 보일 수 있으니 이곳에는 테스트의 결과도 올릴 수 있습니다.


한편 테스트의 결과는 곱슬머리 그(남자친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브런치 북의 주제가 '닮은 듯 닮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인 것처럼 테스트의 결과도 상이한 부분이 있으리라 예상해서 보여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곱슬머리 그를 향한 탐구심은 엄청난 저이기에 그의 사상을 알고 싶어 카페에 앉혀 놓고 테스트를 시켰습니다. 그는 테스트 질문이 많다며 툴툴대면서도 열심히 했는데, 기껏 테스트를 했거늘 오류가 나서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테스트를 하면서 "우리 집은 고기를 판매하는데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당이 생기면 안 좋지", "여자가 남자보다 돈을 잘 버는 경우도 있지"라며 제가 택한 답변들과는 조금 다른 말을 했으니까요.


탐구심은 때때로 인간관계에서 재앙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저는 확산적 호기심이 너무나 많고 도전 정신 또한 있는 사람이라 인간관계에서도 실험적인 일을 가끔 저지릅니다. 글보다는 말을 잘하고 얼핏 들은 말들을 통해 저와 사상도 다르다고 판단한 그를,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와 반대쪽의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곳에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말보다는 글이 편한 저는 제가 좋아하는 환경을 보여주고 싶었고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 속에서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는 "I들만 잔뜩 모인 모임이에요..."와 같은 말을 귓속말로 장난스럽게 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꿋꿋하게 강연을 잘 들었는데, 강연이 끝난 후 생각지도 못하게 말하는 방식 때문에 서로의 마음에 금이 가버렸습니다.


자신이 느낀 불편한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그와 립서비스라도 즐겁고 유익했다는 배려의 말을 먼저 해주기를 바라는 나, 둘 다 자신의 의견은 바꾸지 않고 밀어붙이는 고집, 여기에 후드득후드득 내려서 더욱 기분을 우중충하게 만든 비까지 더해져 강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와 얘기하다가 저는 아주 '펑펑' 울어버렸습니다. 매섭게 쏟아지는 비에 지지 않겠다는 듯 흘린 눈물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내 뜻대로 말해주지 않는 곱슬머리 그를 향한 서운함, 하지만 나의 성향은 바꿀 생각이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 이런저런 생각들을 다 들어내고 나니 보이는 성향/사상의 차이 때문에 그가 내 곁을 떠날까 봐 걱정하는 불안함.


책 <말하기 고수들만 아는 대화의 기술>에서는 '어썰티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을 하면서 깔끔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뜻하는데요. 저는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빈정대면서 소극적으로 공격하는 유형이니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뒤끝 없이 시원하게 자기주장하려는 연습이 필요하고,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의 감정과 상관없이 표현해서 본인은 상처받지 않지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유형이니 마음을 헤아려 주는 말을 한마디씩 덧붙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즉 쌍방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상/성향의 차이도 당연히 존재할 수 있고 이럴 때는 건강하게 소통해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자기주장만 늘어놓고 타인을 폄하하는 키보드워리어가 아닌 이상 우리는 서로 부딪치면서 협의라는 과정을 통해 관계를 다듬어 나가야 합니다. 원래 저는 이럴 때 도망치기 선수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저와 맞지 않으면 기꺼이 혼자 있는 방식을 택합니다.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나 홀로 여행처럼 상대를 물리적으로 차단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대에게 상처를 줄까 봐, 내가 상처받을까 봐 도망치는 것은 그만하고 무섭고도 무서운 부딪치는 연습을 해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요...


얼마 전 곱슬머리 그와 통일교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통일교는 일본에 더욱 많이 퍼져 있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암살 사건과도 간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라 일본 문화를 자주 접하는 저의 말이 많아졌습니다. 균형 잡힌 시각 없이 흥분해서 떠들었더니 말을 내뱉은 목이 까끌하고 제대로 끝맺음하지 못해 석연찮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런 불편한 얘기는 꺼내지 않아야겠다고 그에게 말하니 예전에 다른 갈등 상황에서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다시 말해", "우리가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될 것 같아"라고 말했던 그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피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해."


저와 그는 생각이 다를 때가 있고 의사소통에서도 몇 뼘 더 발전해야 하지만, 저 말은 분명 군더더기 없는 옳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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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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