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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Oct 06. 2024

너랑은 친해지지 않았을 거야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입에서는 아메오토코(雨男), 아메온나(雨女)라는 일본어가 자주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가는 곳마다 비가 오면 쓰는 단어인데, 우리가 함께 여행하면 비 올 때가 많아서 곱슬머리 그(ESTP, 남자친구)는 제게 "아메온나야"라고 하고 저(INFJ, 글쓴이)는 "역시 넌 아메오토코였어"라며 장난식으로 놀립니다. 둘 다 일본어를 할 줄 아니 자연스럽게 쓰게 됐지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는 우중충하고 체감 기온까지 떨어져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시니컬한 친구처럼 느껴집니다만 다행히 그와는 비에 지지 않고 지금까지 즐겁게 여행해 왔습니다. 그와의 첫 여행은 한국 대구였습니다.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간 대구는 비는 오지 않았지만 금세 내릴 듯 하늘이 칠흑색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지금만큼 그와 친하지 않았습니다. 친하지 않아도 서로 좋아하는 마음은 어찌나 컸던지, 한참 운전하고 오후 여섯 시 반에 도착한 카페에서 직원에게 일곱 시에 마감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화가 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황홀하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곱슬머리 그는 아무리 사랑해도 팩트 폭력만은 못 참겠나 봅니다. 저는 열정적인 불에 가깝고 그는 차가운 빗물과 같아서 가끔 제게 현실적인 말이라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게 합니다. 들뜬 제 마음에 찬물을 붓는 그의 모습도 보였기에, 그리고 지금은 해소되었지만 당시 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마음속에서 언제든지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감과 감성을 소중히 여기는 저, 사실과 재미를 중요시하는 곱슬머리 그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절대 친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포항 여행을 떠났을 때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그와 저의 관계는 예전과 꽤 달라졌습니다. 저는 그에게 훨씬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조수석에 앉아 우리 앞의 차는 눈(후미등)이 무섭게 생겼다는 둥, 우리가 탄 이 차는 후미등이 두 겹으로 되어 있으니 쌍꺼풀이 진 눈이라서 착하게 생겼다는 둥 남에게는 하지 못할 아이가 할 법한 얘기를 술술 하는 제 모습을 보면 분명 그랬습니다. 시종일관 곱슬머리 그에게 운전을 잘한다며 칭찬하고 활짝 웃는 제 모습이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는 감정을 온몸으로 내뿜는 댕댕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곱슬머리 그는 누군가와 함께 놀 때 땅을 적시는 보슬비처럼 잘 스며듭니다. 그는 말이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나 자신이 나서서 일할 때도 놀라울 정도로 어느샌가 그 역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 과도하게 긴장해서 무리수를 던지는 일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긴장도가 높은 제 눈에는 그의 모습이 참 신기했습니다.


포항에서도 그는 글램핑 지붕을 적셔 아름다운 빗소리를 자아내는 빗물처럼 자연스럽게 제 기분을 좋게 해 주었습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글램핑 마당에서 바비큐를 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모기향을 여러 개 피우고, 저에게 자신은 불을 피울 테니 반찬과 고기를 접시에 담아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주도하에 샀던 삼겹살과 목살, 러셀즈 리저브 10년 위스키, 하이볼을 만들어 마시기 위한 탄산수, 김치, 달콤한 과자, 마땅한 얼음이 없어 마트에서 사 온 얼음컵 여러 개를 부지런히 챙겨서 바비큐 테이블로 옮겼습니다. 곱슬머리 그는 목장갑을 끼고 땔감에 불을 지피며 제게 농담을 건넸습니다. 글램핑장의 오르막길에서 밑으로 수월하게 흐르는 빗물처럼 그의 몸짓과 말은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씨에 맛있게 구운 고기를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자주 본다는 술 유튜브를 함께 시청했습니다.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양주를 주로 다루는 유튜브였습니다. 곱슬머리 그와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술을 그다지 마시지 않는 그가 술 유튜브를 좋아하는 건 처음 알았네요. 비록 그가 좋아하는 유튜브는 처음 알았지만 우리의 자기 전 루틴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곱슬머리 그는 항상 자기 전에 영화를 잠시 보고 잠에 듭니다. 그의 옆에서 영화를 함께 보다가 제가 졸려서 꾸벅거리고 있으면 그가 저를 침대에 눕히고, 대략 이십 분 정도 후에 그도 들어와서 잡니다. 그와 나 사이에 이러한 패턴도 생기다니, 꽤 친해졌다는 뜻이겠지요?


꽤 친해졌으니 여러분께 제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제 친구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그의 애칭은 곱슬머리 그이고 나이는 30대이고 야구와 제육볶음을 좋아해요. 뜬금없이 소개한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는 사귄 지 3개월이 되었을 때도 그에게 "너랑 별로 안 친하다"라고 할 정도로 사람과 사귈 때 경계하며 돌다리를 백 번 이상 두드려 보고 나아가는 성격인지라 친하다는 말에 인색하고 친한 사람이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친구를 얻게 되어 소개하는 일은 저에게 특별한 일이지요. 아, 뜬금없지만 곱슬머리 그는 착한 친구예요! 굳이 왜 착한지는 묻지 말아 주세요. 어떠한 존재를 무조건 착하고 예쁘다고 해주고 싶은 마음인걸요.


무릇 친구와 친해지면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납니다. 상대와 가까워지니 점차 저의 모습과 비슷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사랑스럽지만 곱슬머리 그의 무심한 말투, 팩트 폭력, 이불을 어차피 나중에 다시 펼치고 잘 건데 왜 접어야 하냐는 등 집안일 관념을 보면 통제하고 바꾸고 싶어집니다. 제가 통제한다고 잡힐 사람이 아니고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살아오며 깨달았으나 이를 포기하기에는 저의 자존심과 이해심이 채워지지 않을 테니 곱슬머리 그와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고 미움의 감정을 느낄지 무섭기도 합니다. 그때 저는 누군가가 한 번쯤 내뱉었을 이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아-, 연애 초반 때는 안 그랬는데..."


다행인 건 제 친구는 싸움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싸움이라는 행위를 다행히 저보다 덜 피합니다. 자기가 생각한 이야기는 무조건 끝까지 해야겠다는 고집도 있습니다. 소통의 부재보다는 이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제, 곱슬머리 그와 영화 <트랜스포머 ONE>을 보았습니다. 친한 사이였던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이 갈라서는 과정을 보니 친구라는 귀중한 단어가 적으로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어서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한편 영화평을 엄격하게 하는 곱슬머리 그는 메가트론이 친구를 배신하는 모습이 너무 개연성이 없고 급작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원래 각성은 급작스럽게 일어나. 서서히 일어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이건 아니다 싶은 거지. 그 각성이 옳든, 그르든 말이야."


중간 설명 없이 각성을 정의하는 저를 보고 곱슬머리 그가 말도 안 된다며 웃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원인, 결과, 근거가 잘 맞추어져야 이해하기도 쉽고 삶도 쉽겠지만 우리 마음은 뜬금없고 급작스러울 때도 많은걸요. 그럼에도 그와의 관계에서 저는 부디 바랍니다. 우리가 언젠가 싸우고 느닷없이 각성해서 친구 사이를 의심하게 되어도 서로를 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마음과 여유를 가진 사람이기를. 곱슬머리 그를 꼭 안았을 때 마음에 꽉 차는 끝없는 아늑함과 따뜻함이 최대한 이어지기를. 사랑과 평화를 지탱하려고 노력하기를.


마지막으로 아늑함과 떨림, 불안함과 무서움... 입체적인 감정을 등에 업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봅니다.


"곱슬머리 그야, 나랑 친구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에 발을 디딘 나야, 난 널 지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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