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에 推し라는 단어가 있다. 비슷한 한국어는 최애.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최애라는 단어를 쓰다니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지 표현하고픈 마음은 어디에나 존재하나 보다. 최애(最愛). 여기에는 사랑이라는 뜻의 애(愛)가 들어간다. 우리는 최애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나는 주로 최애 간식, 최애 멤버, 최애 케이크라는 단어를 쓴다. 최애를 입으로 말하며 사랑할수록 표현하는 게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가끔은 쉽게 입 밖으로 내뱉을수록 그 무게가 가벼워질까 걱정한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고 쌓아서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과 사랑에 대한 고찰 없이 '사랑한다'를 습관처럼 말하는 것은 차이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받는 게 좋다. 사랑이 버릇이 되는 삶이 좋다.
그러나 인생에서 유독 사랑하기 힘든 시기가 있다. 바로 프리랜서 번역가로서 업무가 없을 때다. 프리랜서 번역가의 일은 소낙비와 얼추 비슷하다. '계속 이어지는 특이한 소낙비'랄까? 거친 소낙비처럼 갑자기 일이 쏟아진다. 처음에는 마감일까지 완료할 수 있을지 달력에 표시하면서 확인한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금방 그치는 소낙비와 달리 쉴 틈 없이 업무가 이어진다. 나는 계속되는 소낙비(번역)를 즐겼다가, 힘들어서 쭈그려 앉았다가,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우산이나 우비 같은 보조 도구를 찾다가, 절망했다가 혼자 생쇼를 한다. 일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후련해진다.
소낙비(번역)가 계속 내릴 때는 폭우에 미처 하지 못한 빨래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폭우가 끝나면 빨래도 하고 콧바람을 내면서 상쾌한 마음으로 쉬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계속되던 폭우가 그치고 청명한 하늘이 도래했을 때 발생한다. 폭우에 푹 빠져 있다가 날씨가 갑자기 맑아진 바람에 나의 뇌와 마음은 어리둥절해한다. 후련한 마음도 잠시, 언제 또다시 번역 일이 들어올지 몰라 하루만 지나도 전전긍긍하기 시작한다. 인생에서 한 달 이상 일을 쉬어 본 적이 없다는 친한 언니의 말에는 "언니는 너무 부지런해서 탈이야. 좀 쉬어야 해"라고 단박에 답하면서,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나는 하루 만에 일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며 힘들어한다. 아, 어떤 프리랜서는 편하게 쉴지도 모른다. 일단 나는 그렇다고.
소낙비가 끊임없이 이어지면 맑은 날을 쉬이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 당장 쏟아져 내리는 번역 업무에만 대응하다 보면 현재와 미래를 또렷하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 내가 왜 이 직업으로 일을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와 같은 추상적인 생각부터 시간이 생기면 글을 많이 써야지, 미뤄왔고 꿈꿨던 일을 해야지, 이런 자기 개발을 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번역 업무가 없으면 돈이 창출되지 않기에 불안하다. 번역 업무는 생활을 지탱해 준다. 나의 생각 정중앙에 기둥으로 자리 잡아 다른 일에 도전할 수 있게 해 준다. 가끔 인생이 고되고 인간관계에 배신당할 때는 언제나 받아 주는 안전지대라고도 느낀다. 그러나, 하루 만에 번역 일이 없다고 불안해하는 건 오버이지 않을까? "오버하지 마!"라는 마음속 여자의 외침이 들린다.
나는 몇 달 동안 꽤 많은 번역량을 처리했다. 언제부터 바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1월 1일 즈음은 일본 설날 연휴다. 연휴가 길었지만 한국 번역 업체와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있어서 일했다. 1월 말 한국 설날 연휴에도 일했다. 한편 2월에는 중국 설날 연휴가 이어졌다. 이 중국 연휴가 끝날 때까지 휴식 시간이 생겼다. 물론 프리랜서니까 휴식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정확히는 모른다. 예상일 뿐이다.
모처럼 여유가 생겨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났다. 집에서 간단하게 커피를 마시고 오전에 지난달 마무리하지 못한 정산과 청소를 했다. 겨울이지만 포근한 날씨였다. 날씨마저 좋은 날에 코트에 얇은 목도리를 하고 노트북을 챙겨 차를 타고 스타벅스에 가서 글을 썼다. 이 글도 그때 쓰기 시작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날인데 마음속은 과거 번역 업무가 없을 때처럼 불안함에 요동쳤다.
불안한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이런 마음을 어떡하면 좋을까? 프리랜서의 불안함을 조금이나마 잠식시키기 위해 다음 방법을 제시하겠다.
1. 지금 하는 일, 과정에 목숨 걸고 집중한다.
번역 업무가 바쁠 때 미뤄 왔던 일이 많다. 나열해 본다. 글 쓰는 일부터 번역 툴의 문제 해결하기, 실적서 정리하기, 세차, 차 문제 해결, 주식 투자, 소홀히 했던 운동, 결혼 스냅사진 준비... 그리고 미래와 나 자신을 생각할 시간. 소나기가 내리지 않을 때는 빨래도 하면서 한숨 돌려야 한다. 나는 현재 해야 할 일과 그 일의 과정, 과정 속에서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제목에 굳이 '목숨 걸고'라는 극단적인 문장을 쓴 이유는 극단적으로 굴지 않으면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이것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시기
글 쓰기 모임에서 일과 관련해 생기는 오해를 함께 이야기하다가 누군가가 "이것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일과 관련해 생기는 나의 생각과 불안함, 주위의 시선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에 들어간다는 것. 프리랜서와 불안함은 떼어 놓을 수 없다. 이 시기조차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시간도 내 월 수익에 다 포함되는 거겠지, 뭐.
일본 만화 하이큐에선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인 카라스노와 도쿄 네코마 고등학교가 나온다. 옛날부터 자주 맞붙어 온 두 팀은 서로를 因縁のライバル(숙명의 라이벌)라고 표현한다. 숙명(因縁)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았다. 피할 수 없고 안고 가야 할 숙명은 누구에게나, 심지어 프리랜서에게도 존재하니까. 불안함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숙명도 사랑해 보리라 다짐한다. 나는 사랑이 버릇이 되는 삶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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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