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살아볼 기회
재작년에 밴드부 동아리를 맡았다. 복직하고 나니 아이들은 당연히 내가 밴드부를 다시 맡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난, 복직 후에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밴드부는 방과후 활동, 축제 준비 등 정규 시간 외에도 써야 할 에너지가 많아서였다.
이것저것 따져가며 고민하다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냥 하기로 했다. 몸을 힘들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나오는 에너지도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나는, 복직한 뒤에도 밴드부 지도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3월에 밴드부 오디션이 있었다.
밴드부 오디션
"진성을 얼마나 사용할 수 있나요?"
"노래에 대한 안 좋은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런 피드백도 받아들일 수 있나요?"
"노래를 듀엣으로 하게 될 경우가 있는데 괜찮은가요?"
"지금도 이렇게 떨면, 더 많은 사람 앞에서는 어떻게 노래할 수 있나요?"
"밴드부는 다른 악기와 맞춰가는 게 필요한데 맞춰갈 수 있나요?"
"본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일렉기타 솔로 등 다른 분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데 괜찮나요?"
밴드부 오디션에서 2, 3학년 학생들이 지원자들을 상대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슈퍼밴드 오디션을 방불케 할 정도의 진지함과 예리함이 밴드부실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가장 재밌는 질문은 2학년 학생이 보컬로 지원한 3학년 남학생에게 한 질문이었다.
"좀 무서워 보이는데 조금만 더 착하게 해 주실 수 있나요?"
무서워 보인다면서 할 말은 다하는 2학년 학생들이 귀여워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느무느무 귀여웠다.
11명의 밴드부원들이 진지하게 질문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볼펜을 놓았다. 난 평가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에게 다 맡겨도 될 정도로 평가에 진심이고 열심이었다.
악기별로 1명씩 다섯 명을 뽑는데 12명이 지원했다.
12명의 오디션과 면접이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채점결과를 협의하는 중에 3학년 학생 한 명을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그 학생은 강제전학 온 학생이었다. 여러 일이 소문으로 알려진 모양이다. 밴드부 기존 멤버 중 몇 명이 불합격 의견을 냈다. 밴드부는 연주자들이 합을 맞춰 활동하는 동아리인데 그 아이와 합을 맞추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개인 작업이 아니므로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도 나왔다.
"밴드부는 인성만 보고 뽑는 건 아니잖아. 오디션을 보는 건 실력을 보고 뽑겠다는 건데 실력으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그 말을 듣고 나도 말을 보탰다.
"면접 때 밴드부원들과 합 맞춰서 잘해보겠다고 하는데, 기회는 한 번 줘봐야 하지 않을까? 다른 인생으로 살아볼 기회...."
"밴드를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체험학습 가서도 오디션 일정과 규칙을 확인하던 아이인데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다시 살아볼 기회
그 아이는 밴드부 모집 공고 안내문을 교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밴드부 모집 공고 안내문을 붙이자마자 그 아이는 나를 찾아왔다. 어떻게 해야 밴드부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다. 보컬로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
노래는 1절만 하는지 2절까지 하는지, MR은 어떻게 준비하는지 매일매일 질문을 해댔다.
그러더니 다음 날엔 다른 아이가 와서 물어봤다. 그 아이가 체험학습 갔는데 물어봐달라고 했다고 했다. 엄청 하고 싶은 아이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학교 내에 소문이 자자한 녀석이었다. 친구들과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제전학 오게 된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 앞에서는 못 들은 것으로 했다. 누구나 새 인생을 살아볼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선생님 저 강제전학 왔어요.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아니, 처음 듣는데? "
"강제전학 온 거면 밴드부 못해요?"
"아니 그런 게 어딨어? 여기에서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었다면 안되지. 피해자가 있는 앞에서 가해자가 무대에 서면 안 되니까. 그런데 전에 학교에서 한 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합격증
우여곡절 끝에 그 아이는 밴드부에 합격했다. 보컬 실력으로는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금요일에 오디션을 봤고, 월요일에 합격자 발표할 때까지 비밀을 지키라고 했다.
일렉기타로 지원한 녀석이 월요일 아침에 학교 오자마자 합격했냐고 물었다. 그 녀석과 같이 온 학생은 밴드부원이라 결과를 알고 있을 텐데...
"뭐야? 친구가 안 알려줬어?"
"네... 비밀이라면서 월요일까지 기다리래요."
친구끼리도 비밀을 지킨 모습이 재밌어서 크게 웃으며 합격증을 나눠줬다.
뛸뜻이 기뻐하며 합격증을 받아갔다.
불합격한 도전자들에게도 결과를 알려주며 내년에 다시 도전하라고 했다.
보컬로 합격한 그 녀석은 합격증을 받고 가장 기뻐한 학생이었다. 교복 안주머니에 합격증을 넣어서는 이 선생님, 저 선생님들에게 합격증을 자랑하고 다녔다. 고이고이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보여주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전해 들었다.
밴드부가 그 아이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작년 아이들
밴드부 오디션은 두 시간을 훌쩍 지나 끝났다.
5시 30분이 넘어간 시간, 문을 열고 나오자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앰~~“
재작년 아이들이 갑자기 스무명이나 한꺼번에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고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눈물을 쏟는 나를 보고 아이들이 더 당황해했다.
복직한 나를 보겠다며 한시간 넘게 기다린 아이들, 그 아이들은 휴직기간에 단절되었던 학교의 기억과 시간들을 한꺼번에 불러왔다.
나에게도 새롭게 살아갈 기회가 된 복직의 시간. 그 시간과 이전의 시간이 그렇게 연결되었다.
돌아갈 수 있을지 불투명했던 그 헉교에 복직한 것이 실감났다. 보고 싶었다. 이 아이들.
이 아이들 때문에 암에 걸린 줄 알고 학교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알게 됐다. 5년전에 생긴 암이란걸.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보고 그간의 이런 시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