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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Nov 22. 2023

독자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요

독자를 염두에 둔 채 책 쓰는 방법

학창 시절, 인기를 누리던 잠깐의 시기가 있었다. 교실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만화를 그리던 내겐 이례적인 일이었다. 열한 살 생일 며칠 전이었다. 어쩌다  반 친구들에게 내가 햄버거 집 딸이란 사실을 밝히게 됐다. 규모는 작았지만 햄버거와 치킨, 콜라를 실컷 파는 가게였으니 구미가 당길만했다. 아이들은 갑자기 생일을 물어봤다.  디데이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자 생일 파티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파티에 불러달라 부탁하는 아이도 있었고,  어떤 남자아이는 내 생일 며칠 전부터 날 좋아한다고 동네방네 공언하며 교실 벽에 내 이름을 적기까지 했다.


 기대에 찬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생일이 다가오자 아이들을 이끌고 우리 가게에 갔다. 친구라곤 집에 데려온 적 없고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는 둘째 딸이 친구를 열명쯤 몰고 왔으니 엄마는 신이 났다. 햄버거나 치킨, 피자 따위를 잔뜩 요리해 친구들 앞에 내놓았다. 


 물론 인기는 지속적이지 않았다. 생일파티를 기점으로 내 인기는 하강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나에게 관심 있다던 녀석도 그 이후엔 고백 공격을 멈췄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에게 특별한 악의는 없었다. 놀리려는 의도도 딱히 없었다. 난 반에서 존재감 있는 아이도 아니었지만 딱히 놀림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친구들의 욕구도 이젠 이해한다. 당시 우리에게는 햄버거와 피자가 귀한 음식이었다. 2020년대 초등학생들은 용돈을 몇 만 원 들고 가 마라탕이나 탕후루 따위의 음식을  사 먹는다. 그러나 1990년대 초등학생에게 햄버거를 실컷 먹는 건 특별한 이벤트였고, 친구들에게는 그 이벤트를 즐기고픈 욕구가 간절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엔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는 존재란 생각을 했다. 아이들의 마음도 유치 찬란하다 생각했다. 인기란 어찌나 허무하고 부질없는 것인가 깨달았고. 나는 내 '깊고 풍부한 정신세계'로 인기를 끌고 싶었지만- 당시엔 내가 깊고 풍부한 정신세계를 품은 꼬맹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햄버거 집 딸이란 이유로 일장춘몽과 같은 인기를 잠시 누렸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조숙한 척하던 나라고 해서 친구들과 크게 달랐을까 싶다. 인기와 주목받기를 은근히 바라며 거창한 생일 파티를 연 나 역시, 열한 살 아이 그 자체였다.

  


책 쓰기, 길고 긴 편지     


 글을 쓸 때도 가끔 열한 살 시절과 비슷한 의문을 마주한다. 독자의 마음과 욕구를 알 수 없단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대충 쓴 어떤 글은  엉뚱한 이유로 호응을 받고, 정성껏 쓴 글은 갑작스레 다수의 호감에서 멀어져 간다. 독자의 마음을 제대로 알았다 자신하며 으스대도 한 순간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독자를 마냥 미지의 대상으로 놓아두고 내가 하고픈 말로만 여백을 채우자니 난감함에 빠진다. 내 글을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일이 생기는 건 예사고, 독자의 마음에서 멀찍이 떨어진 엉뚱한 얘기를 꺼내기도 한다. 미스터 트롯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케이팝 얘기를 늘어놓거나, 초면인 독자에게 어릴 적 아픔과 깊고 긴 상처를 단번에 우르르 쏟아내는 저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글이 가치 없고 형편없다 단언하고픈 건 아니다. 저자의 솔직함과 정성을 쏟아 넣은 글은 저마다의 쓸모가 있다. 또 누군가는 그 가치를 알아본다. 그러나 가끔은 내 얘길 들어줄 독자와 접점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가끔 생각한다. 어찌 보면 책은 독자에게 보내는 길고 긴 편지 같다고. 수신인에게 건넬 적절한 말투를 정하고, 상대를 위한 어휘와 표현을 정성스레 고르고 골라 여백을 채운 편지. 편지를 받고 웃음 짓거나 눈물지을 수신인, 즉 독자를 상상하면 글 쓰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주변의 구체적인 누군가를 상상해도 좋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 정도의 상상도 가능하지만 ‘전국 빵집 순례를 다닐 정도로 빵을 사랑하는 A’를 떠올리며 글을 써도 좋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정도의 독자도 좋으나,  ‘글쓰기를 막 시작했지만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잘 모르는 B’를 독자로 상정하고 그에게 편지를 써보는 것도 괜찮다. 구체적인 상상은 욕구와 좌절, 기쁨과 슬픔을 지난 한 인간을 탐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탐구는 상대를 위한 언어를 구현하게 해 준다.


 내 경우엔  청소년 대상의 경제 책을 많이 쓴다. 세상 많은 과목이 그렇듯 경제란 분야에도 마니아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다수 아이들은 경제를 어려워한다. 경제 교과서 속은 그래프와 도표, 논리적 사고로 가득 찬 세상인데, 그걸 부담스럽게 여기는 유형의 아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이 있으니 경제 책을 쓸 땐 구체적인 대상을 상상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그래프와 표를 싫어하고 흥미진진한 역사 소설이나 이야기를 좋아하는 중1 정도의 아이’를 떠올리며 이야기의 앞머리를 꺼내든다. 게임이나 햄버거를 좋아하는 열 살 남짓의 초등학생 꼬마를 상상할 때도 있다. 맥도널드 이야기로 글 서두를 꺼내어, 창립 이야기에서 시작해 물가지수(맥도널드의 빅맥을 활용한 물가지수인 빅맥지수란 게 있다) 이야기로 옮아가거나, 닌텐도의 ‘동물의 숲’ 속 이야기에서 자본주의 이야기로 스리슬쩍 건너가는 것도 가능하다.


 어른을 위한 원고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번아웃이 온 독자에게  첫머리부터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라고 저자가 윽박지르면 다가오던 독자도 달아난다. 재즈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에디 히긴스 피아노 선율이 너무 좋지 않냐고 다짜고짜 묻는 건 상대의 당황을 불러올 수 있다. 번아웃이 왔던 나의 경험을 서두에 꺼내고 그 어려움에 공감해 주면 독자의 마음을 열기 쉽다. 조심스레 에디 히긴스가 누구이며 어떤 음악을 건네는 아티스트인지 이야기해 주는 것도 좋고. 글쓰기를 막 시작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말 없이 '이런 식으로 써라'란 설명만 내리꽂는 것보다 적절한 비유를 담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글 쓰는 방법을 정성스레 밥을 짓는 일이나 달리기에 비유하면 독자의 머릿속에 자연스러운 그림이 펼쳐진다.


 글투도 마찬가지다. 나긋나긋한 말투가 어울리는 상대가 있고, 짧고 강력하고 딱딱한 어조가 조금 더 어울리는 상대가 있다. 물론 저자의 개성과 하고픈 얘기가 중점이 되는 책은 좀 다르겠으나, 상대를 상상하며 어떤 톤이 더 적절할지 정성스레 그 글투를 골라볼 필요도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신중해진다. 그 글투가 책 전체의 톤을 결정하는 경우도 많으니까.(글투를 정하는 이 작업은 보통 본격적으로 책을 쓰기 전, 투고원고나 샘플원고를 쓰기 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정답은 없으나, 대체로 해당 분야를 잘 모르는 독자나 어린 독자에게 좀 더 친절하고 나긋한 글투나 입말체(구어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지식이나 관심사를 쌓고 있는 독자에게는 간결한 글투가 어울릴 수 있고.






  이 모든 얘기를 듣고 누군가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이런 식으로 독자를 배려하다 저자가 하고픈 얘긴 대체 언제 하냐고. 존재하지도 않을 수 있는 독자를 상상하다 압박감에 한 글자도 못 쓰겠다고. 인정한다. 나 역시 내가 하고픈 얘기’와 ‘남이 듣고픈 얘기’의 균형점을 찾데 어려움을 느낀다. 아마 글쓰기를 수행하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숙제 아닐까.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에겐 여러 번의 기회가 있다는 점이다.  처음 쓸 땐 내가 하고픈 말을 활자로 마음껏 내뱉어도 괜찮다. 퇴고(推敲)라는 기회를, 저자는 거머쥐고 있으니까. 초고를 쓸 때야  ‘햄버거 먹고 싶다고 내 생일을 이용해 먹은 이 야속한 친구 놈들아’처럼 거친 속마음을 흰 여백에 내질러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마음의 산물인데.  다만 초고 속 거친 마음, 과잉된 감정은 글을 다듬고 지우고 덧대며 조심스레 가다듬어가면 된다.



책 쓰기의 작은 TIP

1. 구체적인 독자를 상상하고 글을 시작해보자. 상대에게 해주고픈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다 생각하면 좀 더 생생한 글이 나온다. 전체 원고의 일관성을 지키며 집필하기에도 좋다. 주변의 누군가를 가상독자로 정해 글을 써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2. 원고를 쓰기 전에 한 번쯤은 독자의 지식수준이나 관심사, 연령대를 상상하고 탐구해 보자. 그에게 맞는 비유나 표현, 예시를 세심하게 고르기 쉬워진다.

3. 본격적인 집필 전에 원고에 사용할 글투를 고르는 게 좋다. 만약 저자가 스스로 결정하기 어렵다면 출판사와 샘플원고(출판사와 출간 계약 이후, 전반적인 원고 방향을 잡기 위해 주고받는 원고의 일부)를 보낼 때 글투를 다르게 하여 두 가지 버전을 함께 보내 의견을 물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4. 글쓰기 플랫폼이나 SNS에 올리는 글은 내 사연과 글 스타일에 이미 익숙한 독자들이 보는 경우가 많지만, 책은 날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기도 한다. 초면의 독자에게 이야기를 건넨다고 상상하며 글을 써 보자. 그들이 흥미롭게 느낄만한 얘기가 뭔지 생각해 보는 게 좋다.  

5. 대다수 독자들이 관심 갖고 읽고자 하는 실용적인 주제는 건강, 외국어 공부, 자기 계발, 운동, 재테크 등등이다. 대체로 우리가 새해소원으로 성취 기원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된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관심사나 대중의 필요를 내 관심사와 융합해 책의 기획을 정하면 독자의 흥미나 이목을 끌기가 비교적 쉬워진다.

6. 처음부터 독자를 상상하며 쓰는 게 부담스럽다면, 초고는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쓰고, 퇴고 과정 동안 제1의 독자가 되었다고 상상하며 글을 다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p.s.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유랑 선생입니다. 오늘 발행하는 글은 비교적 책 쓰기 요령에 가까워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글을 쓸 용기나 글쓰기의 희로애락에 대해 이야기하는 날도 올 것 같습니다.


 지난주 프롤로그에 남겨주신 댓글을 읽으며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어요. 이웃분들, 독자분들의 과분한 칭찬 댓글을 때마다 제 '글과 삶' 사이의 격차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글 바깥의, 가정을 꾸리며 직장에 다니는 저는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실수에 실수를 연발해서 ‘이 똥멍청이야!’라고 스스로에게 화내고 외치고 싶은 심경일 때가 많거든요. 제가 가장 못 참는 감정이 ‘남에게 민폐 끼친다는 느낌’인데, 최근 들어 모자란 구석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의구심도 여러 번 들었고요.(제 안의 완벽주의가 있거나 자기 기대치가 높아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취약해서 실수를 연발하는 분야가 있답니다)취약한 구석과 별개로 진로고민도 계속하게 되네요. 마흔이 넘었지만 역시나 진로 고민은 평생 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 같고 서투른 나, 똥멍청이 같은  나도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한단 생각이 들어요. 그 사실을 얼른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지고 나아지는 구석이 있더라고요.


 글쓰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의 글쓰기가 부족하다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당연히 서투르고 의욕에 비해 모자랄 수도 있어요. '꾸준히'가 어려울 수 있고요. 당연할 수 있는 부분이니 받아들이고 한 발씩 내디디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 글 읽으시는 분들 뿐 아니라 제 자신에게도 건네고 싶은 이야기라 덧붙여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30일(목)(어쩌면 29일(수))에 발행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모르고 연재 브런치북에 발행을 안해서ㅠ

올렸던 글을 다시 삭제하고 연재하는 곳에 다시 발행했어요. 댓글 남겨주신 이경. 캐리소 두 분 작가님 죄송합니다ㅠ

라이킷 눌러주신 분들께도 죄송해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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