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출혈 이후 나와 가족들은 24시간 매 시간, 매초, 매 순간 붙어있는 삶을 살았다.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내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씻기, 옷 입기 등 일상생활조차 혼자 할 수 없던 탓에 늘 남편이나 엄마가 옆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점점 많아지고,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보호자의 밀착보호는 속박이 되었다. 이런 얽매임은 나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마찬가지였다. 일거수일투족을 뒤치다꺼리하는 남편도, 매순간 나와 다투는 엄마도 나를 상대하고 받아주는데 싫증을 느껴가고 있었다. 환자인 나도, 보호자인 가족들도 점점 서로의 존재가 귀찮아졌고, 그런 마음들은 매 순간 사소한 일에도 짜증으로 서로를 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답답함을 풀기 위해 블로그를 하거나 생각을 메모하거나 하는 등의 시간을 가지면서 해결해갔다. 아니면 가족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율운동을 하며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환자 못지않게 힘든 보호자
환자의 마음재활을 위해서 환자의 개인시간, 개인 공간, 개인 여가도 중요하지만, 보호자의 마음재활도 중요하다. 환자를 계속 지키고,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환자 곁에 있어야 되는 만큼 환자들의 정신적 고통보다도 보호자들의 정신적 에너지소모가 더 클 지도 모른다. 그래서 환자의 심리 안정이 주가 되겠지만 보호자의 정신 건강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환자가 쓰러지던 모습을 대부분은 보호자들이 본 경우가 많아서 트라우마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환자에게 우선순위가 밀리고, 환자를 케어 하느라 보호자들의 심리나 정신 건강에 소홀해지며 보호자들의 몸도 마음도 지쳐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들에게도 병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을 방지하려면 환자도 보호자도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다. 그래서 몇몇 병원들에서는 주말이나 일과 후 시간에 보호자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나 이벤트들을 마련하기도 한다. 보호자들의 자유시간? 혹은 힐링타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마저도 환자를 홀로두고 떠나지 못해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는 보호자들이다.
혼자만의 시간, 은둔의 즐거움
한창 병원에서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했을 때, 인터넷에서 좋은 글귀들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은둔력’이라는 단어를 본적이 있다. 은둔이란, 세상일을 피하여 숨음 이라는 뜻을 가진 약간은 어둡고 외롭고 쓸쓸한 느낌의 단어인데, ‘은둔의 즐거움’이란 책의 저자는 ‘은둔’을 이렇게 정의한다.
나에게 집중하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몰입을 하고, 회복하는 힘을 충전하는 시간(_은둔의즐거움)
나 스스로에게 혼자 즐길 수 있는 휴식을 주고 그 공간 안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잊고 있던 ‘은둔력’을 끌어내라고. 누구나 가끔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바라고 즐길 때가 있다. 혼자가 외로울 때도 있지만 혼자라 편할 때도 있듯이. 책 ‘은둔의 즐거움’에서는 은둔의 공간이라고 해서 모두가 동떨어지진 외롭고 쓸쓸한 곳만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고 한다. 자동차 안도, 짧은 산책도 좋고, 혼자 앉아 있는 카페나 가볍게 음료 한 잔 마시는 편의점도 은둔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주위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에게 집중하고 나만 생각할 수 있는 의식의 집중이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고.
은둔의 공간에서 보상처럼 주어지는 안락한 시간들은, 내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충분한 동력이 되어줄 것입니다(_‘은둔의 즐거움’ 중에서)
혼자만의 공간 찾기
나는 남편과 엄마의 굴레를 벗어나 은둔의 공간을 찾기 위해 병원 여기저기를 다녔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니 생각보다 기동력이 좋았다. 한발, 한팔로만 휠체어를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운전(?)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휠체어는 후진으로 가는게 짱이다..^^ 대신 뒤를 잘보고 운전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이 있다. 휠체어를 후진해서 다니며 찾은 나의 은둔의 공간은 계단통로였다. 대부분 병원의 계단은 비상통로로 쓰여서 인적이 드물다. 간 김에 계단오르내리기 운동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낙상의 위험이 크고, 비상시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힘들어서 웬만하면 환자 혼자 가지 않으셨으면 한다. 무엇보다 냉,난방이 안 되는 공간이라 별로다.. 계단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다. 앞으로 이런 계단은 어떻게 다니나 하는 걱정부터 하루일과를 정리해보기도 하고, 혼자 울기도 하고 계단통로에서 많은 걸 했다. 또는 치료실. 내가 있던 병원 중 한 곳은 일과 후 치료실을 개방하여 환자들이 자율운동을 할 수 있게 했는데 최대한 사람이 없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치료실을 찾아 그곳에서 혼자 운동을 했다. 운동하는 모습을 찍기도 하고 생각나는 사람들한테 전화도 하고, 남편 눈치 안보고 혼자 있는 공간이 너무나 큰 위안이 되었다. 혹은, 야외공간. 엄마와 보바스기념병원에 있을 때는 1층 야외정원에 많이 갔다. 걷는 연습하러도 가고, 주말에는 야외테이블에서 노래도 듣고, 책도 읽고, 병실친구들과 산책도 가고 그랬다. 어느 병원을 가든 나만의 공간을 찾아두고 힘들 때마다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단,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어야 한다. 환자인 만큼 돌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환자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 보호자도 그제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환자나 보호자나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서 은둔해야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쉬워진다. 그럼 은둔의 공간에서 무엇을 하냐고. 그래봤자 병원인 곳에서?
나만의공간&시간
혼자만의 시간 활용
환자라면 은둔의 공간에서 은둔의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을 치유하는 것도 좋지만, 신체재활에 있어서 기막히게 좋은 타이밍이기도 하다. 신체 재활은 내 몸을 얼마나 잘 느끼고 조절하느냐가 가장핵심인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해볼 수 있는 때가 은둔의 공간에서 은둔의 시간을 보낼 때이다. 오로지 몸에 집중해보면서 신경가소성이 극대화될 수도 있다.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눈치 보느라 못 잔 잠을 자는데 쓰지 말고, 내 몸에 집중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을 권한다. 한번은 내가 제일 신뢰하는 치료사가 내 준 숙제로 <하루 10번, 10분씩 서있기>를 한 적이 있다. 단 연속으로 서 있으면 안 되고, 서 있는 동안 노래듣기, 대화 등 다른 행동도 일절 하면 안됐다. 이 숙제를 할 시기에도 나는 독립보행이 가능했고, 마지막 병원으로 있던 곳이라 이 숙제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했던 재활 운동이나 숙제 중에 제일 효과가 컸고, 지금도 하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 숙제를 할 때는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은둔력을 발휘하여 숙제를 해나갔는데, 나만의 공간에서 내 몸에 집중하는 이 시간들이 나에게 그야말로 힐링 타임이었다. 10분 집중해서 서 있고, 끝나면 그 공간에서 하는 생각들이 그렇게 좋았다. 내가 발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신체인식능력이 좋아졌고, 인지 수준도 점점 좋아졌다. 퇴원이 가까워졌을 때는, 퇴원 후 생활 계획도 짜보고, 퇴원 후 나의 삶을 상상하거나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이런 활동들이 내게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재활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