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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Aug 11. 2022

곧 죽어도 워라밸

 무언가에 쫓긴다는 것도 도망가는 중일 테다. 쫓긴다는 말의 모습은 어딘가 정신없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듯해 보인다. 잡히면 큰일 날까. 식은땀을 휘날리며 전력질주해야 하는 건 본인을 위해서일까. 더 큰 피해를 피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도망일 수도 있다. 회피는 통하지 않는다. 산사태처럼 몰려오는 문제들을 그저 눈 감기로는 해결할 수 없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채 직면해버리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어릴 땐 매일매일 도망쳤다. 비유적인 도망침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도망. 경찰과 도둑이란 놀이에서 도둑 역할을 맡을 때, 길 가던 친구에게 장난 걸고 복도를 헤쳐나가며 도망갈 때, 지각 벌점 면하려고 몰래 담을 넘다 선도부장한테 걸렸을 때. 육체적인 도망을 하기엔 여력도 체력도 부족하다. 아마 많더라도 그때처럼 도망갈 기회가 많지가 않다. 인생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갈 상황은 손에 꼽을 것이다. 이젠 정신적인 도망만 있을 뿐.


 일을 하다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아직 해본 적 없다. 이와 달리 언제든 도망칠 각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2시간 전, 회사 동기에게 오랜만에 개인 톡이 왔다. 점심 먹고 커피 마시자 한다. 동기의 카톡엔 이모티콘이나 ㅋ, ㅎ, ~, ! 등 여유가 느껴지지 않고 단조로웠다. 그리고 둘이 만나자고 할 땐 역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올해 안에 도망갈 예정이라고 한다. 정확히 도망이란 워딩을 사용했다. 본인의 포트폴리오를 더 알차게 해줄 수 있으면서 더 높은 연봉이 있는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


 본인의 이직 사유를 말하던 동기는 내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정확히는 이직 계획인데 보통 3~4년 차에 이직을 하니 뭐 나도 하게 된다면 그 정도에 하지 않을까 얼버무렸다. 단둘이 대화하면 꼭 시간제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정립되지 않은 채 말하게 된다. 3명이면 대답을 유보할 시간을 마련할 텐데. 단둘이, 그것도 친한 사이가 아닌 둘의 대화는 티키타카가 있어야 한다. 3~4년 차라 말하고 나서도 내가 왜 이직을 해야 하지란 고민을 했다. 이직할 이유는 더 만족해야 할 곳을 가야 하는 건데 워라밸을 극히 중요시하는 난 치열하게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곳을 갈 수 있을까. 연봉을 더 많이 준다고 해도 그걸 쓸 시간이 없는 회사에 가는 게 행복할까. 결국 커피집에서 나오면서는 “아 모르겠다”란 이직에 대한 최후의 답변을 했다.


 날이 갈수록 일에 대한 두려움은 사그라들고 있다. 처음엔 영수증 처리하는 것에도 별 걱정이 많았다.  내 글씨는 알아볼까, 영수증이 삐뚤어졌나, 뭐 빠뜨린 절차가 있었나. 그런 와중에 카피를 써야 하는 경우나 새로운 OT를 받는 날이면 하나에 집중하기도 힘들어 긴장하고 항상 피곤했다. 이젠 일의 우선순위도 잡히고 일정을 조율할 여유도 생겼다. 짬이 생기니 짬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더라. 그래서 일로부터 도망가고 있다는 생각보단 일을 해나가고 있다. 미션처럼 하나 달성하면 그다음 단계로 이어 달리는 일 사이의 바통터치를 하는 간극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쩌면 워라밸이 도망가지 않기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연봉보다는 워라밸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면 다들 금수저인지, 일에 욕심이 있는지 물어본다. 어릴 때부터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보단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어렵게 어렵게 고민한 결과 정말 하고픈 일을 찾았고 운이 좋게 하고 있다. 얼추 생각하던 이상적인 업무를 하고 있어 꽤 만족스럽다. 게다가 나만의 시간이 보장되어야 하는 환경도 갖춰져 있다. 하고 싶은 일과 나만의 시간이 보장되는 게 바로 워라밸 아닌가. 오늘 저녁에 뭐 할지 고민할 수 있는 회사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누구라도 공감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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