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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Aug 18. 2022

우리 사이가 고독했으면 해

 고독해 보이는 게 예절일 때도 있다. 생각해 보면 고독해서 해가 되는 경우는 적은 것 같다. 심지어 먹을 때 쩝쩝 소리를 내지 않는 게 예절이라고 배웠다. 묵묵히 밥을 음미하며 먹어야 한다고 배웠고 그게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어느 순간 소리를 내지 않으면 할 말이 없는 사람,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식사시간이 곧 쉬는 시간인 회사나 친구들과의 만남 같은 경우엔 쉴 새 없이 떠드는 게 식사 분위기가 되었다. 게다가 끝이 없는 폐활량을 자랑하듯, 보기와는 다르게 입속이 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데시벨 높은 면치기가 맛있게 먹는 필수 조건에 속하는 듯했다. 어느 예능에서는 면을 끊어 먹거나 조용히 먹는 연예인을 신기해하는 패널들의 모습이 자주 보일 정도로 면치기는 먹방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혼밥일 때는 어떤가. 혼자 떠들면서 밥 먹기가 더 어렵겠지만 누군가는 통화를 하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넷플릭스를 보면서 혼밥을 한다. 음식보단 그 외의 것에 눈길이 간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고독할 수 없게 된다. 겉으로 보기엔 고독해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그렇게 사람들은 밥상에서의 고독을 잃어갔다. 어느새 밥상에서의 고독은 외로움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길 원하는 사람들이 빈번히 있다. 남들과 대화할 때 뒷담화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재밌었던 썰을 풀거나, 해프닝을 전하길 좋아하는 사람. 대체로 그런 부류의 사람은 고독에 익숙지 않을 테다. 젓가락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우는 순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귓속을 울리는 시간제한이 있는 타이머의 재촉 거리는 소리처럼 받아들일 테다. 하지만 그 사람도 사람인지라 대화 소재의 한계가 있다. 어디선가 말했던 내용을 말하고 또 말하는 것도 지친다. 그제서야 다음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이 침묵에 직면하는 순간이 온다. 그 충돌의 여파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간다. 본인이 고독을 못 견디는 걸 깨닫거나, 다른 사람들은 왜 말이 없는 걸까 생각한다. 결국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친구랑 놀 때 어떤 대화를 하는지”, “친구랑 있으면 말을 하는지” 이로써 질문자의 가치관도 드러난다. 회사 사람이 곧 친구라는 등식이 성립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쉴 새 없이 말을 옮길 수 있었던 이유가 저 등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회사 사람과 친구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동기끼리는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그 외의 다른 직급의 사람들은? 내게 친구 같은 사이란 뭘까. 서로 놀리는 사이? 여행 가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도 되는 사이? 그 친구의 걱정이 걱정되는 사이? 물론 회사 사람이라고 서로 놀리지 않거나 그 사람의 걱정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단 진심으로 놀리거나 걱정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뭔가 내 안에 방어기제가 있는 듯하다. 방어 방법 중엔 거리두기가 있다. 상대가 무작위로 손짓 발짓해도 피해가 가지 않는 거리감. 사람 간의 선이 명확히 있는 게 속 편하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서로에게 지켜야 할 선은 있지 않나. 그 선이라는 게 계약처럼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친구와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대화도 하고 이것저것 해보며 쌓인 선이니까. 각자의 감정이 고조되지 않는 한 그 선은 꼭 지킨다. 누군가라도 선을 넘는 순간 그동안 쌓아왔던 선은 먼지가 되어 흩어지게 되니까. 물론 흩어지더라도 그 주변을 배회하지 않을까. 선은 견고하지 않은 재질이라 그런지 회사에서만큼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적인 용도의 선을 두기가 어렵다. 최대한 사적인 감정을 덜어낸 재질의 제2의 선을 앞으로도 잘 지켜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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