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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Oct 29. 2022

하루 종일 노트북을 봅니다

 온전히 내 소유물이 아닌 노트북이 생긴 게 고작 2년 전이다. 그전까진 가벼움을 자랑하는 LG그램을 매일 들고 다니며 학교를 가고 카페를 갔었지만 이젠 자주 손이 가지 않는 책장 위에 올려두고 있다. 내가 잠시 빌린 노트북을 마주한 건 첫 출근 날이다. 내가 앉을 자리엔 이미 노트북이 세팅되어 있었는데 다크 그레이의 삼성노트북이었고 LG그램보다 두께감이 있었지만 그 묵직함이 좋았다. 첫 출근이라 긴장해서 그런지 지나치게 일찍 가서 팀엔 아무도 없었다.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고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눌렀을 때가 생각난다. 차가운 1월이었고 곧게 굳은 정장의 불편함을 입은 채 노트북에 이것저것 설정을 하고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모든 걸 저장해 놓고 있을 줄 알았던 노트북 속의 폴더에도 그 기억은 저장되어 있지 않지만 키보드 위 전원 버튼이 그 기억을 상기시켜줬다.


 예전 대표님이 하신 말이 있다. “광고인은 딱 2가지만 있으면 된다. 사람과 노트북.” 이 두 가지는 심플해 보이지만 광고업 자체를 요약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단어이다. 사람은 쉽게 말해 그저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란 것도 있지만 내가 봤을 땐 인사이트를 가진 사람이라 이해했다. 우리 모두가 알고는 있었지만 누군가가 짚어주기 전까진 인지하지 못했던 그 무엇. 최고의 전략은 인사이트란 걸 매번 회의하면서 느낀다. 카피의 기법이 출중하지 않아도, 크리 안에 키비주얼이 없어도 앞단에서의 인사이트가 잘 팔리기만 해도 그 아이디어는 팔렸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대표님의 말을 이제야 이해한 것 같다.


 인사이트가 내재된 힘을 말하는 거라면 광고에 필요한 2가지 중 하나였던 노트북은 보여지는 힘이다. 전사에겐 칼이 있고 궁사에겐 활이 있듯 요즘 광고인에게 노트북은 무기다. 인사이트를 찾는 것부터 광고를 만드는 것까지 또 광고를 보는 것까지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는 노트북은 우리가 출근할 때 처음으로 터치하고 퇴근할 때 마지막으로 어루만져 주는 소중한 존재다. 금요일의 지하철 막차를 타면 직장인들이 노트북이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보인다. 술에 취해 비에 젖은 신문지처럼 축 처져 자고 있는 직장인을 보면 핸드폰은 바닥에 떨어뜨린지 오래지만 노트북 가방만은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노트북은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동고동락을 같이하는 노트북엔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가 있다. 누군가는 회사용 컴퓨터임에도 불구하고 겉에 이것저것 스티커를 붙인다. 김치를 싫어하고 콜라를 좋아하는 사람. 댄디한 옷을 즐겨 입는 그는 취향이 확실한 타부서 팀장님이다. 누군가의 바탕화면을 보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텅 비어있고 최근 진행 중인 일들에 대한 폴더가 일렬로 쫙 정리되어 있다. 매일 아침 자리를 청소하느라 여기저기 움직이고 공용 냉장고가 더러워지면 직접 청소를 하시는 우리 팀의 팀장님이다. 누군가는 바탕화면 맨 왼쪽은 자주 쓰는 기본 폴더를 중간엔 진행 중인 업무들을 오른쪽엔 사적인 폴더를 배치하기도 한다. 방에서도 물건의 위치가 늘 그대로 있는 걸 좋아하는 본인이다. 이 정도면 노트북의 첫인상은 곧 그 사람의 첫인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언젠간 노트북으로 사람 성향 분석해주는 게 생기지도 않을까. '노트북으로 본 당신의 성향을 인물로 하면 나폴레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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