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기명 Sep 21. 2022

작은 양말이 맵다

 패션의 완성은 무엇인가. 고급 시계? 얼굴? 시계는 고관여 제품이라 하나의 기준점으로 잡기는 어렵고 얼굴은 선천적이라는 제약과 예능에서 농담으로 쓰이는 게 아닌가. 저관여 제품에다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착용하는 양말을 패션의 완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양말까지 신경 쓴다는 건 곧 섬세함까지도 보여주니까. 패션은 디테일로 완성된다고 하지 않나. 양말과 가방 색의 깔맞춤이던가 넥타이의 문양, 자켓 단추 등 어쩌면 나만 알 수 있을 법한 스케일의 디테일을 꽤 신경 쓴다. 장인 정신이 깃든 것처럼.


 흰양말. 대략 4년 전인가 배우 류준열이 흰양말을 무척 좋아한다는 인터뷰가 있었고 그걸 보고 생애 처음의 양말 쇼핑을 했었다. 양말 하나에 이렇게 비쌌구나... 하얀색도 다 같은 하얀색이 아니었다. 누런색의 하얀색, 린스를 과다 투여한 듯한 하얀색. 또 길이도 마찬가지다. 아킬레스건을 가리는 길이, 반스타킹 정도거나 과하다 싶을 정도의 길이까지. 이처럼 양말에도 가지각색 포인트가 있고 다른 옷과의 매치를 위한 판가름이  양말의 길이는 패션 철학의 깊이와 비례하는 듯하다. 확고한 철학이 있는 사람의 양말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형광색이거나 형형색색 줄무늬거나 스타킹처럼 길거나. 아직 내 양말은 무지 흰색에 정강이까지만 올라오는 클래식한 단계이다.


 양말에선 길이만 중요한 게 아니다. 구멍이 난 양말은 치명적인 오류에 속한다. 한치의 구멍은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듯하다. 애석하게도 시스루 티셔츠의 구멍은 과감함이라 부르고, 찢어진 청바지의 구멍은 화려함이라 하지만 구멍이 난 양말의 구멍은 초라함이다. 괜히 양말 끝을 당겨 발가락과의 공간을 둔다.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고 종일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양말에 구멍 뚫린 걸 마주한 기분은 마치 남대문이 열려있던 때와 유사하다. 양말의 구멍이 몸 전체를 집어삼킨듯하다.


 양말로 인한 초라한 감정은 남의 양말에서도 표출된다. 아킬레스건뿐만 아니라 발바닥의 절반 이상이 보이게끔 걸쳐진 양말을 보면 누군지 모를 그분에 대한 허술함이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동시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카페에서 누군가 신발을 벗고 양말을 반쯤 벗은 채 책을 읽는 것을 본 적 있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바로 허술함과 안정감 그 중간이었다. 공공시설에서 볼 수 있는 이색적 풍경의 놀라움과 안방을 보는 것 같은 왠지 모를 편안함 때문인가. 사람의 기반은 말 그대로 발바닥이 아닌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의 발바닥을 세심히 볼 수 있는 경험은 드물다. 그래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분의 발바닥의 잔상이 아직까지 이미지로 남아있나 보다.


 발바닥의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양말에 집중해 본다. 양말은 다른 옷과는 달리 오직 한 겹이다. 반팔 위의 셔츠, 속옷 위의 바지. 양말은 오직 하나. 다른 것과 레이어드하지 않는 의류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독자적인 양말이라 그런지 착용과 탈의 순서도 명확하다. 뭐 바지나 상의를 입는 순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양말만은 비슷하지 않을까? 나도 그렇고 친구들을 관찰해 본 결과 가장 나중에 신고 가장 먼저 벗더라. 심지어 양말을 신고 벗을 때의 몸의 움직임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크다. 어딘가에 앉아서 양말을 신어야 한다. 이 조그마한 양말을 위해 무릎을 가슴에 붙이고 행여 삐져나온 발톱에 걸리지 않도록 세밀한 손놀림으로 양말을 신는다. 하지만 벗을 땐 고된 하루의 발자취를 털어내듯 훌훌 벗어낸다. 그래야 그토록 마음속으로 찾았고 그리웠던 침대에 누울 수 있고 집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안도감이라는 향수를 맡을 수 있게 된다. 이 삶의 안정감은 양말을 벗어야 시작된다.

이전 10화 관찰에 목적이 생길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