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 밤을 까주는 것은 찐이다.

깐 밤이 이어준 인연

by 박희종

나는 밤을 좋아한다. 가을이 되면 잘 익은 삶은 밤을 까먹는 것도 좋아하고, 고소한 군밤을 사 먹는 것도 좋아한다. 군 시절에는 훈련 중에 주운 밤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군번줄로 까먹는 것도 좋아했다. 내가 밤을 좋아하는 것을 우리 어머니도 잘 알고 계셔서, 항상 이맘때가 되면 시장에서 밤을 사다가 삶아주시곤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꼭 밤을 삶은 후에 내가 먹기 좋도록 과도로 하나하나 까주셨다. 보통 내가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씻고 있으면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시며(실제로는 밤을 까시느라 귀로 듣고만 계신다.) 밤을 까고 계신다. 어릴 때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도 밤을 까주시는 어머니를 보며 누나들은 한소리를 하기도 했다.

"엄마! 쟤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그냥 지가 까먹으라고 둬요!"

어머니는 그런 말을 들으시면서도 매번 밤을 까주시곤 했고, 나도 내가 먹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엄마가 까주시는 밤을 맛있게 먹고는 했다.

내가 처음 아내와 먼 곳을 가게 되었을 때, (아직 썸을 타기도 전에 업무적으로 함께 이동하고 있을 때이다.)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었다. 그때가 딱 이렇게 밤이 익어가고 있을 무렵이어서 우연히 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밤을 주우시면 꼭 삶아서 까주세요. 딸들 먹으라고. 항상 그 자리에서 몇 시간씩 밤을 다 까놓으시는데, 나랑 동생이 먹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아요."

나는 순간적으로 우리 어머니가 떠올랐다.

"우리 어머니도 그러시는데."

나는 그 당시에 아내가 참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의 기준으로 밤을 까주는 것은 엄청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밤 이야기를 하다가 정안 휴게소에서 군밤을 사 먹게 되었고, 그렇게 서로의 대한 호감이 조금씩 쌓여가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나는 이맘때만 되면 과수원을 하시는 장인 어른댁에 가서 일을 도와드린다. 과수원의 일은 나름 노하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주로 힘을 쓰는 일이나, 아버지가 바빠서 못하시는 밤 줍기, 호두 따기, 대추 따기, 감 따기 등을 하는데,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밤을 주워오면 아버지는 고된 과수원일을 마치시고도 과도를 잡고 밤을 까신다. 이제는 먹일 사람이 많아져서 더 많이 까야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하나도 귀찮지 않으시다.

작년에 우리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아내는 입덧이 참 심했다. 속이 안 좋아서 밥을 잘 먹지 못했는데, 그래도 신기하게 아버지가 까주신 밤은 잘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밤을 자주 까주고는 했다. 어쩌면 우리 아이는 할아버지랑 아빠가 까준 밤을 먹고 튼튼하게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지난주에 나는 과수원에 가서 밤을 주웠다. 온몸에 50번은 넘게 모기를 물려가며 주운 밤이지만, 올해 밤이 유독 크고 탐실해서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주운 밤을 잔뜩 가지고 와서 어제 처음으로 삶았다. 그리고 아이를 재우고 육아에 지친 아내가 먼저 잠든 사이에 나는 TV를 틀어놓고 밤을 까기 시작했다.

아이와 아내를 위해 밤을 까면서 나는 어머니도 되어보고, 장인어른도 되어보았다. 한 알 한 알 까면서 벌레 먹은 밤들을 골라내고, 부서지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까다가 조금도 부서지지 않고 예쁘게 벗겨진 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흐뭇했다. 나는 밤을 까며 맛있게 먹을 아이의 모습도 상상하고, 나에게 고마워할 아내의 모습도 상상했다. 그렇게 1시간을 넘게 까고 나니 겨우 작은 반찬통 하나를 채울 수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밤을 까주는 것은 찐이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와 아내는 너무 감사하게도 그런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밤을 까줄 수 있는 사랑이 넘치는 아이로 자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열심히 밤을 까줘야겠다.

오늘 까놓고 온 밤을 먹고 우리 아이도 아내도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보너스! 밤이 잘 까지게 삶는 법

1. 밤을 삶기 전에 30분 이상 물에 불려놓으세요.
- 밤의 껍질이 불어서 과육과 잘 분리됩니다.

2. 중간 사이즈 밤을 기준으로 30분 정도 삶아주세요. - 센 불에 삶으면 중간에 물이 많이 줄어들거나 탈 수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3. 다 삶아진 후에는 불을 끄고 10분 정도 뜸을 들이세요. - 이유는 잘 몰라요ㅎㅎㅎㅎㅎ

4. 마지막으로 찬물에 5~10분 정도 담가주세요.
- 중간에 물이 금방 따뜻해지니 두 번 정도 갈아주시는 게 좋아요.
- 불었던 밤 껍데기가 급격히 수축해서 과육과의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렇게 하면 신기하게도 정말 예쁘게 잘 까지더라고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