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몇 년 차 즈음, 주변 선배와 동기들이 하나 둘 용하다는 곳을 찾아 사주를 보러 다녔다. 허우적 거리며 일을 배워가던 때를 조금 넘기고 나자 도대체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건지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결혼은 해야 하는 건지, 공부를 더 해야 하는 건지, 적성에 안 맞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질문은 있는데 답은 없는 그런 것들에 대한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다.
동기들과 명동의 한 까페에 앉아 서로의 하소연을 듣다 즉흥적으로 ‘타로, 사주, 관상, 손금’ 따위를 간판에 내 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주를 봐준다는 분은 생각보다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었는데 생면부지의 이 분에게 생년월일시를 알려주고 다소간 긴장된 마음으로 답을 기다렸다.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기시네 하며 지나치지는 못할 이야기들.
뭐라고 장황하게 설명을 많이 해줬는데 지금 와서는 다 과거가 되어버린 일들이라 기억에 남는 건 내가 사주를 봤다는 사실과 복비가 4만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10년마다 대운이 바뀐다고 말했다는 거다. 10년 주기가 20,30,40세인지 21,31,41세인지 그것마저 기억이 안 나는데, 아홉 수라는 게 정말 있는 것처럼 나이 앞자리 수가 바뀌는 그 즈음 마음 심란한 일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해에는 마음이 평온했나하면 그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지만 내가 유난히 그 나이대의 일들에 마음을 쓸 수 밖에 없던 탓에, 대운이 바뀌기 전의 관문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 열아홉, 스물 즈음의 대한민국 청소년이라면 누군들 심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거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다시 공부를 하거나, 군대로 가버리거나, 장래에 대해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때이니 아홉수의 첫경험이랄까. 어두운 밤 불 켜진 독서실에서 고개를 파묻고 문제집을 풀고 있으면 괜히 우울해지는 날들이었다. 모의고사를 보고 가채점을 하고나면 내가 원하는 대학은 저만치에 있는데 현실의 나는 한없이 초라해보였다. 모의고사를 형편없이 보다가도 실전에서 대박 났다는 수험생들의 간증(?)을 읽다가 내가 저리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지만 실상 진정으로 하고 싶은 공부가 뭔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 더 불안했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건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 건지 그려지지도 않는데 수능만 잘 본다고 될까 고민하고 있으면 어른들은 모르겠으면 그냥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라 조언했다.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다 문득 마흔 살 이후의 삶은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아 결국 하라는 대로 시험 문제만 주구장창 풀었다.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을 선택했고 열렬히 원하지는 않았지만 상상하던 미래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남들이 괜찮다고 여기는 교육대학교에 진학했다. 무척 행복하지도 않았지만 다들 인정해주는 맛으로 그럭저럭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대학생활을 해나갔다. 때때로 뜨거운 사랑, 말도 안 되는 일탈, 인생의 터닝 포인트 따위를 갈망하며 생각보다 인생이 시시하다고 여겼다.
나의 고뇌와 내적 갈등 따윈 아랑곳없이 남 보기에 술술 풀리는 인생이었으니 졸업 후, 성공과 명예와는 거리가 멀지만 소시민으로 살아가기엔 아쉬움 없는 직장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직장에서의 고통과 어려움 따윈 아랑곳없이 연차가 쌓였고 나만 참으면 남 보기에 그럴듯한, 무리 없는 ‘내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았다.
서른 즈음의 관문은 또 다른 선택을 필요로 했다. 직장 생활은 적성에 안 맞았지만 생계를 유지해야했고 그만둘 용기가 없어 나를 굳이 직장에 끼워 맞춰가며 꾸역꾸역 해나갔다.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인생이 행복해지지가 않아 직장 동기들과 어울리며 즉흥적인 즐거움도 추구해보고 취미생활도 해보고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해보기도 했지만 늘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이게 직업적 만족도의 문제라고 여겨 -내가 꿈꾸는 삶을 열렬하게 추구하지 않은 죗값처럼-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데 방점을 뒀는데 의외의 계기로 아예 다른 돌파구를 찾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게 바로 ‘결혼’이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결혼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서른 즈음이 되고 보니 결혼 하겠다 마음먹고 나서 마땅한 상대를 찾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었다. 집을 사겠다 마음먹고 내가 가진 자본과 대출 가능한 금액을 따져본 후, 임장 다니면서 가격에 맞는 최적의 집을 사는 것. 막상 해보니 결혼도 물건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른들이 결혼은 연애와 다르다고 하는 게 이런 지점인가 보다. 서른의 관문은 그렇게 결혼과 함께 시작되었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결혼으로 잊혀 졌을까? 결혼은 기존의 문제를 약화시키고 다른 시급한 문제들로 대체했을 뿐이었다. 즉 혼자 풀어야 하는 강도 3의 문제를 강도 1로 축소시키고, 강도 5의 문제를 인생에 끌고 오면서 이제 모든 문제를 2명 이상이 같이 풀면 된다고 하는 식이다. 뭐가 더 나은 걸까? 무튼 좋고 나쁨을 떠나 대운이 바뀐 것은 확실했다. 진로 고민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스테이지로 넘어갔으니. 결혼 생활로 고군분투하는 사이 또 10년 주기의 관문이 다가오고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찌 이리도 빨리 돌아오는 건지.
서른 아홉 그 해에 새 집으로 이사했다. 테라스가 있는 로망의 집에 이사 오는 여정은 전혀 ‘로망’에 걸맞지 않았다. 살던 전셋집이 제 때 나가지 않아 집주인에게 전세 보증금을 못받는게 아닌가 가슴 졸여야 했다. 집 보러 오는 사람은 많은데 그 누구도 선뜻 계약하질 않았다. 집주인에게 사정 사정을 해 전세값을 조금 내렸지만 그 즈음 가격이 솟구쳐 오른 부동산 시장은 누구에게도 자비롭지 않았다. 겨우 전세 보증금을 받아 쥐고서는 이사 가려는 집 담보대출을 한도껏 받아야 했고 호기롭게 사직서를 쓴 남편의 이직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었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석 달이 되고 그럼에도 어느 회사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약속대로 대출 원리금은 갚아야 했으므로 생활비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오면 씻지도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력서를 쓰거나 알 수 없는 서류들을 작성하고 있는 남편이 참 한심해 보였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믿어주고 아끼고 하라는 말을 굳이 왜 주례사로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 지나가는 한 때라고 여기며 힘을 내보려고 하지만 내 상황도 그리 녹록하지 않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새로 맡은 부장 업무에, 전교에서 내노라 하는 어려운 아이가 학급에 있었다. 나를 부장 자리에 섭외한 관리자는 2년 만에 학교를 떠나면서 나를 그 자리에 앉혀놨던 거였다. 그렇다고 고사 할 수만도 없었는 게 워낙에 다들 떠나고 싶어 하는 학교라 부장교사 할 경력자가 없었다. 학내 규정을 바꿔가며 기간제 교사까지 부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시 방석에 앉느니 부장업무 좀 더 한다 마음먹었는데 문제는 업무보다 그 해에 만난 아이였다.
종종 후배들이 ‘그 아이가 교직 인생에서 가장 힘든 케이스였나요?’라고 묻는다. 자신들의 미래를 가늠해보고 싶은게지. 대답은 ‘노. 상위권에 속하긴 하지만 탑은 아니다.’ 그러면 후배들은 다소 충격받은 듯, 시무룩하고도 생각이 많아지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여름 서이초 사건이 있었고 우리는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들 앞에 웃으며 교단에 섰지만 당장이라도 집어치우고 싶었고 나 역시 ‘그 아이’와 그가 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항의성 민원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힘든 한 해를 버텨낼 수 있었을까? 대학 다닐 때 졸업을 앞 둔 우리들에게 학과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했었다.
- 여러분이 졸업하고 교사가 되면 대한민국의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될 겁니다. 일 년이 긴 것 같지만 우리 인생에서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닙니다.
크게 감동적이지도 멋지지도 않은 그저 담담한 말씀이었는데 이리 오래 기억되는 걸 보면 우리가 겪을 숱한 마음고생을 미리 예견하고 토닥토닥 위로해주신 그 마음이 전해졌나보다.
교수님 말대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심정으로 매일 아침 테라스에 나가 하늘을 봤다. 해가 뜨려는 어스름에도, 이슬비가 내리는 날에도, 맑은 날도, 더운 날도 그렇게 매일매일. 그 순간만큼은 걱정거리도, 힘든 마음도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다.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거나 새 잎이 나오는 식물들을 돌보거나 꽃이 핀 모습에 감탄하거나. 테라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고통과 상처와 슬픔이 감히 넘어올 수 없는 곳처럼 느껴졌다. 지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테라스에 앉아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나의 고통이 한없이 멀어졌다. 완전한 안전지대가 있다는 것, 그 힘으로 한 해를 넘겼다. 마지막 관문을 넘기고 지금은 진정 대운이 바뀌었다는 것을 안다. 역사는 반복되므로 언젠가 또 시련과 고난이 있을 테지만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니 버텨내는 수밖에.
6월이 되자 여름 느낌이 난다. 녹음이 짙어지고, 옥수수가 키를 쭉쭉 뻗는다. 봄철 아름다웠던 튤립은 구근까지 다 살찌웠는지 잎이 시들었고 수국 꽃망울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다. 올 해는 수국도 성공적이라 꽃이 화분을 꽉 채울 예정이다. 새로 모셔온 글라디올러스와 백합 같은 여름 식물들이 이제 꽃봉오리를 보여준다. 남편이 우겨서 모셔온 신비 복숭아 나무에 잎이 무성해지자 아들은 언제 복숭아가 달리냐며 성화다. 네가 초등학생 될 때 즈음이라니까 뜻을 모른 채 그저 ‘오예~’하고 좋아한다.
이곳을, 나의 정원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