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수현은 꿈을 꾸고 있었다. 가족과의 단란했던 주말 오후의 꿈이었다.
꿈속에서 수현은 아침나절이 한참 지나서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다. 이윽고 아빠의 기상을 더는 기다릴 수 없던 아이가 방으로 들어와서는 커튼 뒤로 숨어들며 조그맣게 외쳤다.
“아빠, 나 찾아봐요.”
이내 자지러질 듯 넘어가는 아이의 웃음소리.
아, 저 소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아닐까. 수현은 감탄하다, 그 소리를 놓칠세라 땅으로 내리누르는 듯한 피로를 이겨내고 무거운 눈을 떴다.
봄날 오후의 투명한 햇살이 스며든 침실은 옅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봄빛을 등에 지고 커튼 뒤에서 들썩이고 있는 작고 부드러운 그림자. 7살인데도 녀석은 아직 자기 눈만 가리면 남들에게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수현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내려앉았다. 아내는 침실 문 옆에 서서 웃음을 참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어디 있나?”
수현이 몸을 일으켜 슬금슬금 창으로 향하자 아이는 꺄르르, 구슬이 실로폰 위로 굴러가는 듯한 맑고 높은 소리를 냈다. 만면 가득 미소가 번진 수현이 “우리 쪼꼬맹이가… 여깄네!” 하며 커튼 채로 아이를 안아 올리자, 동시에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따사로운 봄볕과 함께 방안을 가득 메웠다. 눈부신 오후였다.
그 순간 수현은 잠을 깼다. 흐릿한 눈앞으로 뭉그러진 이미지와 소리의 잔향이 떠돌고 있었다.
어? 방금까지 있던 아이와 아내는 어디로 간 거지? 맑은 웃음소리가 아직 귓가에 울리는데, 보드랍고 따스한 여린 살결의 감촉이 아직 손끝에 남았는데, 갑작스레 찾아온 적막에 수현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꿈……이었던가? 눈앞에 어른거리던 커튼 뒤의 작은 실루엣이, 늘 함께 맞던 주말 오후의 그 평온한 순간이… 모두 꿈이였단 말인가?
수현은 그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기 없다. 나는 방금 또다시 그들을 잃었다. 통렬한 고통이 전신을 날카롭게 꿰뚫고 지나갔다. 수현은 다시 그 꿈속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이 모든 것이 꿈이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한참을 모든 것을 토해내듯 울고 나서야 수현은 그들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꿈속의 잔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후에도 수현은 매양 비슷한 아침을 맞았다. 행복의 절정에서 마주하는 그 상실감은 늘 같은 무게로 덮쳐왔고, 그 아픔을 딛고 다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수현은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점점 버거워지며 어느 순간부터 수현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아침을 맞는 게, 그 아픔을 다시 겪는 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었다. 여름맞이 공포특집으로 신작이 계약되어있는 터라 이미 원고를 넘겨야 했지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탓에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뭐라도 집중할 데가 필요한 수현은 밤낮으로 원고를 붙잡고 있었다.
어느 오후 소파에서 작업중 그만 선잠이 들었다. 또다시 예의 그 달콤한 꿈속으로 빠져든 수현은 잠시나마 행복한 한때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느닷없이 잠이 깬 순간, 방금까지도 그를 감싸고 있던 환영은 단숨에 사라졌다.
아아-. 어찌할 도리없는 고통에 몸을 내맡기며 수현은 깨달았다. 어떤 종류의 슬픔은 죽을 때까지 고스란히 간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무리 애써도 과거의 기억들을 가지고선 이곳에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전신으로 터져 나오는 슬픔에 바들바들 떨며 수현은 휘청이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어떻게든 삶을 되찾아야 한다. 이곳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지라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두고 왔으니까. 결국 이 세계에서 생을 다하게 된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이 오는 그날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수현은 다시 필사적으로 컴퓨터에 매달렸다. 뉴스라든지 서적, 공식적인 자료들 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것들은 모조리 뒤졌다. 어딘가에는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해도 나는 이렇게 평행 우주를 건너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역시나 방법은 없었다. 평행 우주 자체가 여전히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고, 증명되지 못하거나 실현 불가능한 이론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돌아갈 길은 요원했다.
그렇게 점점 지쳐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커피 한잔을 내려 책상 앞에 앉은 수현은 간밤에 새로운 우주 통로 같은 것이 발견되지는 않았는지, 우주 이동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성과가 있진 않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과학뉴스 섹션을 뒤졌다. 하지만 도움이 될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흥미 위주의 뉴스들만 화면 가득 지루하게 나열되고 있을 뿐이었다.
휴-, 깊은 한숨을 뱉고는 스크린을 내리고 일어설 때였다.
터치를 잘못 인식했는지 화면이 스르륵 넘어가더니 스크린은 어느새 라이프 섹션의 메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수현은 곁눈으로 화면을 쓱 한번 훑고 커피를 다시 내리려 방을 나섰다.
몇 발짝 갔을까. 갑자기 수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뭔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은 수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독자 투고란에 조그맣게 실린 사설이었다.
[유체상태로의 우주 간 이동 가능성에 대해….]
기이한 제목에 내용을 보기도 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상태인지라 ‘우주 간 이동’이란 문구가 저도 모르게 눈에 들어왔으리라. 유체라니……. 하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필요했다.
쓴웃음을 삼키며 화면을 터치하자 사설 전문과 함께 글쓴이로 보이는 노인의 상반신 사진이 나왔다. 성성한 백발과는 달리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에 온화하지만 묘한 미소를 띤 그녀는 긴 머리를 뒤로 단정히 쪽을 지고 생활한복을 입은, 마치 오래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꽤나 고전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잠시 사진을 주시하던 수현은 천천히 눈앞의 사설을 읽어내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그녀는 본인을 우주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나, 이제는 다른 학문을 통해 본인 나름대로 우주의 원리에 대해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우주를 과학만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태도는 이론에만 치우친 편협한 행위이며, 우주는 과학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으로 차라리 초자연적, 영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경험상 더 바람직하다고 했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에만 집착해 우주를 해석하려는 과학은 언제까지고 우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이 깨달은 방식을 통해서는 눈으로 보이는 세상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이해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는데, 자신은 유체이탈을 통한 영(靈)의 상태로 보통의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세상의 다른 모습을 보았으며, 그 상태에서는 차원의 문을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거기까지 읽어내린 수현은 혀를 차며 스크린을 내렸다. 전체적으로 그녀의 어조는 무척이나 단정적이었지만 읽을수록 허무맹랑했다.
무당같은 건가?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의 외곽에 점집이라든가, 무당집 같은 곳들이 있었다. 영혼과 접신하고 귀신을 몸에 받아들이는 등의 사기를 치며 안 그래도 힘든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용해서 먹고 살던 사기꾼 비슷한 부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치가 있나 보군.
수현은 입가에 조소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인이 절실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아침, 수현은 평소와는 좀 다른 꿈을 꾸었다. 그것은 유체상태로 가족을 찾아가는 꿈이었다. 투명한 몸이 알 수 없는 빛에 감싸인 채 상하좌우조차 구분되지 않는 아득한 공간을 내처 헤매다 마침내 가족과 만났다고 생각한 순간 돌연 꿈에서 깨어버렸다. 깜짝 놀라며 눈을 뜨자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따스했던 풍경이 물러난 자리에 지독히도 낯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몇 번을 깨어나도 언제까지고 익숙해지지 않는 지독한 현실.
제기랄! 수현은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냉수를 벌컥 벌컥 들이킨 뒤 식탁 위로 스크린을 띄워 기사를 마구 헤집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어디였더라……. 스크린 위를 다급하게 휘젓던 손이 한순간 컵을 바닥으로 동댕이쳤다. 주방 바닥에 부딪힌 컵이 산산조각이 나며 요란스레 사방을 울렸다.
이런…… 대체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수현은 엉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자괴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 얘기가 헛소리든 아니든 밑져야 본전 아닌가! 수현은 이성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어차피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수현은 이마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를 한데 모아 묶고는 컵의 잔해를 깨끗이 정리한 뒤 새 컵을 꺼내어 커피를 내렸다. 원두가 분쇄되는 소리와 추출되는 소리, 곧이어 투명한 잔으로 커피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쌉쌀한 향과 함께 황량한 사각의 공간을 천천히 채웠다. 적막을 깨어버린 그 자잘한 소란이 반가워 수현은 실로 오랜만에 가슴 한켠으로 작은 기쁨을 느꼈다. 그래, 나는 아직 살아 있어.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수현은 의식처럼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삼키고는 식탁 위로 무질서하게 펼쳐진 기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연락처가 있을까? 왠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참, 진짜 저 허튼 소리를 믿기라도 하는 것 같군. 조금 멋쩍은 기분으로 사진을 터치하자 사진이 사라지며 바뀐 화면으로 투고자의 이름과 sns 주소가 나타났다.
김유진이라…. 아마도 이 기사를 보고 (영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누구라도 연락을 해오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무속신앙따윈 전혀 믿지 않는 자신과 같은 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수현은 곧바로 그녀의 sns로 쪽지를 보냈다. 사설을 보았는데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가능하면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수현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답신을 기다리다 마침내 머리를 내저으며 일어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현대문물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아니던가. 하지만 영업이든 뭐든 하려면 연락처 정도는 공개하는 게 순서 아닐까? 저 쪽지를 과연 보기나 할는지…. 다른 연락처도 없이 sns 주소만 덜렁 올려놓은 저의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내심 못마땅해하며 토스트기의 버튼을 누를 때였다.
딩동! 홈 시스템의 알림음이 청량하게 울렸다.
설마, 하면서도 얼른 화면을 띄워 수신함을 확인했다. 쪽지가 와있었다. 그녀가 보낸 것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빠른 답장에 약간 놀라며 쪽지를 열자, ‘오늘 시간이 괜찮습니다.’ 라는 역시나 단출한 문장과 함께 명함이 첨부되어 있었다. 명함의 앞면으로 직접 쓴듯한 붓글씨로 <영성철학관. 언제든지, 무엇이든 상담 환영합니다.> 란 상투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다.
철학관이라…. 핏, 맥빠진 웃음을 흘리며 검지로 명함을 드래그하자 명함의 뒷면이 나오며 주소가 보였다. 무심히 활자를 따라가던 수현의 시선이 살짝 가늘어졌다.
G시라…. 수도권에서 아주 먼 지방 어디쯤 아닐까 하는 생각과는 달리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수현은 막 구워진 토스트를 입에 물고 곧바로 현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