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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니오 Oct 27. 2024

#5. 적응


눈을 뜨자 새카만 허공 위에 무언가 떠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나무였다. 공중에 둥둥 뜬 채 반짝이는 무수한 뿌리를 아래로 뻗치고 있는 나무.


수현은 그 나무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나무의 뿌리는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나무 둥치로부터 뻗어나온 큰 뿌리에서 여러 갈래의 작은 뿌리들이 돋고, 그 각각의 뿌리에서 또 다른 뿌리들이 돋아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그렇게 뿌리는 끝도 없이 갈라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속에서 수현은 보았다.


각각의 뿌리마다 존재하는 선택의 순간들.

그리고 매 선택마다 끝도 없이 새롭게 분기되어 나가는 각각의 평행 우주들.


그 수많은 우주들을 보면서 수현은 생각했다.

지금 내가 와있는 이 세계는 나의 최초 시간에서부터 분기된 평행 우주들 중… 과연 어디일까?     






크-헉!


수현은 거친 호흡과 함께 급작스레 현실로 돌아왔다. 소파 위에서 팔다리를 바르작대다 바닥으로 떨어진 참이었다.


지끈한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눈을 떴다. 어둑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해가 진 건지, 아직 뜨지 않은 건지 수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돌아보니 거실 여기저기로는 구겨진 맥주캔이 뒹굴고 있었다. 지난밤 고주망태가 된 상태에서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밤새 수현은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사방을 온통 둘러싼 평행 우주 속에서 원래의 세계를 찾지 못해 끝도 없이 헤매고 또 헤매는 꿈.


그리고 지금,

수현은 여전히 꿈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낯설고 휑뎅그레한 거실을 바라보다 수현은 그대로 몸을 움츠러뜨렸다. 익숙한 절망감이 전신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술… 술이 더 필요해.


그때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수현의 귓가로 낮은 벨소리가 날아들었다. 잔잔하지만 묘하게 신경을 긁는 소리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수현은 당장 벨소리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식탁 아래에 떨어져 있는 폰을 집어들 때쯤 벨이 멈췄다. 화면으로 수십 통의 부재중 알림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악몽보다 더한 현실이 여기 있군. 수현은 폰 전원을 끄고 다시 소파 위로 드러누웠다.


다음 날, 요란스레 울리는 알람에 수현은 퍼뜩 잠이 깼다. 잠이 덜깬 출근 준비를 서두르다 눈앞의 낯선 공간에 그만 얼어붙어 버렸다. 


난 여전히 여기 있는건가. 하, 하하.


허탈하게 제자리에 주저앉는 순간, 머릿속으로 스르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늘의 일정이었다. 출판사와의 미팅이 오후에 잡혀있었다.


흐흐흐, 비틀어진 입가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 누구지? 과연 진짜 내가 맞긴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진 건지 수현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수현은 머리를 감싸 쥐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한동안 수현은 꼼짝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키고 또 삼키는 일밖에 없었으니까.






이 세계의 수현은 원래의 수현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어떤 점에서는 정말 같은 자아가 맞을까 싶을만큼 극과 극으로.


이 세계의 그는 제법 알려진 유명 작가인 데다 독신으로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탓에 수현은 한동안 온갖 이니셜로 저장된 여러 여자들의 전화를 받는데 진땀을 빼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 세계의 기억을 온전히 지닌 채여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도무지 자신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 것이어서 수현은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가 수현보다 훨씬 자존감 높고 주체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문제의 그 날, 담임의 강압 아닌 강압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그는 본인의 희망을 고수했다. 이후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분야에서 꽤 인정받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건 겉에서 보이는 면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완벽한 성취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수현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삶의 원형 같기도 했다.


그날부터였을까? 그와 내가 이토록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였을 지도 몰랐다. 대체 얼마나 먼 과거의 시간부터 그는 자신과 다른 길을 걸어온 건지 그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돌연 화가 치민 수현은 쥐고 있던 맥주캔을 우그려뜨렸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먼 세계로 와버린 걸까?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난 그저 열심히 살아온 것밖에 없는데…….  


그때 뱃속 안쪽에서 어떤 목소리 하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어때? 이런 삶. 정말 멋지지 않아? ……그래, 너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어. 아니, 아직 늦지 않았지. 지금부터라도 네게 찾아온 이 엄청나고도 놀라운 우연에 감사하며 새로운 삶을 누려보는 건 어떨까?


그러다 순간, 수현은 소스라쳤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잠시라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수현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수현에겐 자신의 삶이 있었다. 소중한 가족과, 이곳에 비하면 하찮아 보일지라도 공들여 가꾸어온 자신만의 세계가.

.

.

.

.


그렇게 두달이 지났다. 


그사이 수현은 이곳에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되었다. 그건 물론, 타인이 아닌 자신의 자아와 공존하기에 가능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수현은 계속 여기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급한 일정을 제외한 모든 일정을 모두 정리한 수현은 여러 선을 통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방법은 요원했다.


‘수현’이라는 자아는 판이하게 달랐을 망정 두 세계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부적인 것들이 미묘하게 다르긴 했지만, 기술 수준이라던지 전반적인 세계의 양상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건 시간의 문을 통한 슬립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평행 우주로의 이동은 커녕 몇 시간 안으로 한정된 슬립만 가능했다.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수현은 쓰디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이미 본래 세계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이후 완전한 무기력 상태가 찾아왔다. 아침에 눈을 떠보았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양손에 꼭 쥐고 있던 삶이 통째로 사라졌다.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져내린 것이다. 작지만 안락했던 집.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소소했던 그 모든 일상들이 그저 신기루처럼 시야 속에서 어른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수현은 종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참담한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술기운에 몽롱한 채 아무데나 드러누워 가족에게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깨기만을 반복하는 채로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러다 이따금 정신이 들 때면 수현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운명의 장난이 자신을 여기에 데려다 놓았듯이, 다시 한번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원래의 세계로 데려다주기만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 문을 부수기라도 할 듯 작정하고 두드려대는 소리에 수현은 잠을 깼다. 마지못해 눈을 뜬 수현은 숙취로 묵직한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실은 술병과 캔, 과자봉지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상태였다.


얼마 동안 이러고 지낸 거지?


밀려오는 두통에 수현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초점 없는 눈을 끔뻑이는데 잠시 잦아지는가 싶던 소리가 다시 커졌다. 수현은 발에 걸리는 것들을 대충 헤집으며 천천히 월패드로 향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패드를 터치하자 숨이 막 넘어갈 듯한 표정의 매니저가 나타났다. 그는 한 손으로는 폰을 확인하며 다른 손으로는 연신 문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폰을 꺼 놓은 지 꽤 된 것 같군.


수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고민하다 이내 패드를 향해 퉁명스레 내뱉었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하-! 살아계셨네요. 일단 문부터 좀 여시죠?”


매니저가 화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소리를 쳤다. 사람 좋아보이는 둥글둥글한 얼굴에 처음 보는 살기가 떠올라 있었다. 여자들과 스캔들을 매번 낼 때에도 저런 표정은 아니었는데 화가 단단히 난 것 모양이었다. 하지만 수현은 거실을 한번 쓱 둘러본 뒤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미안한데, 지금은 좀 곤란해.”


“이번엔 또 뭡니까? 저번에 그 여자도……. 아니, 적어도 전화는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 달 스캐줄 다 미뤄달라시길래 겨우 일정 조정해놨는데, 연락도 없이 또 펑크내시면 어쩌시겠다는 거예요?”


화면 속 매니저의 얼굴이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 미안해. 일이 좀 있었는데…, 이제 괜찮아. 폰도 방금 켜놨다고.”


수현은 하품을 하며 패드에 폰을 갖다 댔다. 폰이 켜진 것을 확인한 매니저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진짜 별일 없으신 거죠? 그럼 미리 연락이라도 주면 좋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고요.”


수현은 눈을 찡긋하고는 과장된 제스처로 두손을 모아 보였다.


“정말 미안하다니까. 여하튼 지금은 좀 정신이 없어서 나중에 연락할게.”


매니저는 여전히 벌건 얼굴을 한 채 가슴께를 들썩이고 있었지만 더는 채근하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이런 일 있으면 그냥 문 따고 들어갈 테니 그런 줄 아세요.”


씩씩거리며 돌아서던 매니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현관 쪽을 째어보았다. 그러나 이내 단념한 듯 고개를 내저으며 차에 올랐다. 


잠시 후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주위는 이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실내는 순식간에 다시 적막 속으로 잠겨들었다. 


수현은 가만히 거실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풍경이 마치 멈춰버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어쩐지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순간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 다급하게 냉장고 문을 열어젖힌 수현은 맥주를 꺼내어 단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갈증은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 


제길, 제길. 수현은 옹송그린 몸을 소파에 묻었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현실을 아무리 회피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돌아갈 수 없다. 영원히 여기에 갇혀버린 것이다. 


가망없는 희망이 점점 멀어지다 이윽고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며 수현은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이 고통도 끝이 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자 의식이 바닥없는 심연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질타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가?


수현은 눈을 번쩍 떴다.


아니! 아니다. 언젠가는 돌아갈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 차원이동터널이 발견될 수도 모른다. 시간터널의 발견 또한 그렇지 않았던가? 그래, 내가 포기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다. 모든 것은 내가 포기할 때야 비로소 끝나는 거니까.


수현은 눈을 번쩍 떴다. 성큼성큼 주방으로 걸어가 연신 물을 들이켰다. 맑고 찬 액체가 메마른 전신에 서서히 스미며 갈증이 다소간 해소되었다. 그러자 급한 허기가 들었다. 냉장고를 확인했지만 먹을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수현은 유통기한이 약간 지난 우유에 시리얼을 넣어 꾸역꾸역 삼키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해쓱해진 볼, 얼마 전보다 많이 야위고 황폐해진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신이 나를 여기로 데려다 놓은 데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만에 하나라도 그런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야. 이렇게 망가져 가는 건 내게도, 이 삶의 본래 주인인 그에게도 최악의 선택일 테니까.’


수현은 시리얼을 깨끗하게 먹어치우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걷어붙였다. 한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곳을 다시 원상복귀시키는 일이 만만치는 않을 터였다.


종일 수현은 구석구석 정성들여 집안을 청소했다. 정리가 끝나자 칙칙하던 집안은 금세 본래의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말끔히 면도까지 마치고 나니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새로운 결의와 함께 희망찬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언젠가, 그 날이 올 때까지.     


새로운 세계에의 적응은 순조로웠다. 아니, 성공한 작가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유쾌한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걱정 없는 재정 상태와 명성, 팬들의 무한 애정까지. 모든 것이 원래의 수현은 겪어본 적도, 결코 겪어볼 일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수현은 소질이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글을 써낼 수 있었다. 그 과정은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집중하여 글을 쓸 때면 완전한 몰입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을 주었다. 매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며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그런 것들이야말로 늘 바라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수현은 새로운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처음에는 돌아갈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어느덧 수현은 다소간 본래의 삶을 잊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라도 잊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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