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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니오 Oct 27. 2024

#7. 유진

한 시간 남짓 스산한 풍경의 외곽을 달리자 “자연의 도시 G시!” 라고 적혀진 표지판이 보였다. 그것을 따라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적한 시골 느낌의 고즈넉한 도시가 나왔다.


수도에서 지척인 곳에 이런 전원풍의 마을이 있다니, 수현은 조금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G시는 처음이었으나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정감이 가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도심을 벗어나 조금 더 들어가자 곧 난관에 봉착했다. 한가롭고 여유로워 보이던 시내와 달리 외곽으로 가자 분위기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낡고 지저분한 주택들이 미로 같은 골목 사이사이로 촘촘히 자리하고 있는 그곳은, 과거의 어느 시간대로 들어오기라도 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현재와 괴리감이 느껴졌다. 


더는 차로 들어가기 힘들겠어. 이 근방인 것 같은데…….


수현은 동네 어귀의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워치의 네비게이션에 의지해 길을 찾았다. 하지만 엇비슷한 주택들은 다 거기가 거기 같아 보였다. 누군가에게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골목을 내처 헤매도, 사람이 사는 게 맞는지 싶을 정도로 사람은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지역이 아직도 있다니. 정말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가? 수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휑한 거리를 둘러보았다. 연락처라도 받아놨어야 하는 건데 다급한 마음에 바로 달려온 것이 뒤늦게 후회됐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 주소를 찾지 못해 헤맬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그러는 사이 해가 머리 위로 떠오르며 기온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등으로 끈끈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좁은 골목을 돌고 있는데 대문 뒤로 숨이 넘어갈 듯 맹렬하게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날선 그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진 수현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망할! 이마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좁은 골목을 막 돌아나올 때였다. 골목 끝 오래된 단층주택의 칠이 거의 벗겨진 녹색 대문 위쪽에 덩그러니 매달린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군. 집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이 여실한 녹슨 대문은 주위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 듯 버젓이 열려 있었다. 하긴 도둑은커녕 사람 구경조차 힘든 마을이었다.


수현은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앞을 서성이며 그 안을 기웃기웃 훔쳐보았다. 막상 눈앞에서 보는 그곳은 어릴 때 몇 번 보았던 여느 점집과는 전연 달랐다. 갖가지 부적들이 여기저기 붙어있고, 그 위에 오색 줄이나 꽃 같은 것이 주렁주렁 달린, 길을 지나다 마주하면 가슴이 철렁해 얼른 반대쪽으로 내달리게 되는, 범접하기 힘든 오라를 뿜어내는 그런 이미지를 생각하며 찾고 있었는데, 그곳은 간판 외에는 근처의 주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의 깊게 보지 않고서는 몇 번이라도 그냥 지나칠 만했다.


쯔-.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벨쪽으로 팔을 뻗던 수현은 이내 손을 내렸다. 원래의 세계나 지금의 세계에서나 이런 곳을 직접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무턱대고 오긴 했지만, 영(靈)이라든지 신(神)같은 것은 이제껏 믿어본 적도 없거니와, 그런 것에 의지해 무언가를 도모하려고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잘못 온 게 아닐까, 그냥 돌아갈까 고민하다 막 발걸음을 돌리는 찰나, 수현은 그만 소스라치고 말았다. 대문 안에서 느닷없이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유진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왔군요.”


사설 속 사진과 꼭 같은 모습을 한 유진이 반달눈을 하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수현을 마중이라도 나온 듯 했다. 


“아, 아닙니다.” 수현이 더듬대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이쪽으로 들어와요.” 방긋 웃은 유진이 안쪽으로 안내했다.


“아, ……네.”


수현은 그 스스럼없는 태도에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따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참, 이제 와서 그냥 갈 수도 없고 곤란하게 되었군.


그러나 쭈뼛대며 대문을 들어선 순간, 눈앞의 풍경에 수현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담 안쪽으로 작은 정원이 있었다. 널찍한 안마당 한 귀퉁이에 위치한, 언뜻 봐도 제법 신경써서 가꾼 듯 보이는 그 정원 가득 한여름의 햇살을 닮은 새하얀 수국이 눈이 부시도록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건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꽃이었다.


식물을 잘 키우지는 못하는 아내는 수국을 몇 번 들였다 이내 포기하고, 그 대신 여름이면 수국 명소들을 찾아다녔다. 깻잎처럼 보이는 잎 위에 덩그러니 놓인 꽃에 별 감흥이 없던 수현도, 짧은 여름 한철 여러 색깔로 피어나는 그 꽃을 언젠가부터 좋아하게 되었다.


벌써 그 계절이 온 건가. 기억과 함께 울컥 솟구친 감정에 목울대가 후끈거렸다. 수현은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다 그만 흠칫 놀랐다.


어느샌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유진이 한쪽 눈썹을 올린 채 두꺼운 안경 너머로 호기심 어린 두 눈을 반짝이며 수현의 여기저기를 뜯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장난감이라도 마주한 아이 같았다.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어 입을 막 열려던 그때였다. 머리를 갸웃대던 유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이런… 뭔가 씌었군.”


그 소리에 수현은 정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뭐?? 귀신에라도 씌었단 말인가? ……역시 오는 게 아니었어. 이런 뻔한 상황이라니, 난 대체 뭘 기대한 거지?’


수현은 밀려드는 실망감보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더 화가 났다. 곧 부적이나 굿 얘기가 나오겠군, 하고 생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치미는 화를 간신히 누르며 돌아가야겠다고 말을 하려는 그때였다. 수현의 기분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듯 연신 여기저기를 뜯어보던 유진이 돌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아니야. 다른 게 아니라 같은 혼이 둘이네그려. 희한하군. 정말 희한한 일이야.” 


수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눈앞의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정말 뭔가를 보는 건가? 


혼란스러운 수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진은 따라오라는 듯 두어 번 손짓을 하고는 마당을 유유히 가로질러갔다.


‘얘기를 좀 더 들어본다고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정말 황당무계한 소리가 나오면 그때 박차고 나와도 늦지 않을테니.’


수현은 저만치 앞서가는 유진을 허둥대며 쫓았다. 그녀의 뒤로 향내가 은은히 번져 나오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딸랑, 하고 맑은 풍경소리가 짧게 울렸다. 실내에는 유진에게서 나던 향내가 진하게 풍겨나오고 있었고 바깥과는 달리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수현의 뒤로 슥 문이 닫혔다. 동시에 사방은 묘한 침묵에 잠기고 공기의 결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마치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세계에 발이라도 들인 것처럼.


선뜻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현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현관 앞의 대나무발을 헤치며 유진이 들어오라

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하는 수 없이 수현은 다소곳이 놓인 유진의 운동화 옆에 구두를 벗어두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아담한 거실이었다. 그러나 거실이라기보다는 실상 서재에 가까웠는데, 거실 전면으로 원목으로 짜여진 책장이 있었고, 그속에 빈틈없이 책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 외에는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나무 탁자만 보일 뿐 딱히 가구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어째 작가인 자기보다 책이 더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수현은 곁눈질로 실내를 쓱 훍었다.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보일 정도로 낡았지만 꼼꼼하게 잘 손질된 모양새가 전반적으로 소박하고 정갈했다. 다만 알지 못할 글귀들이 빽빽이 적힌 누렇게 바랜 한지들이 벽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탓으로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쪽으로 앉아요.”


어색하게 서 있는 수현을 좌탁으로 안내하며 유진이 말했다.


세월에 닳아 윤이 반질반질 나는 탁자 한쪽에는 서류나 책 따위가 조금 위태롭게 쌓여있었다. 그것을 보며 수현이 쭈뼛하자 유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긴히 하던 일이 좀 있었어요. 급하게 정리한다고는 했는데, 신경쓰지말고 편하게 앉아요. 차라고 한 잔 내어올테니.”


“아, 네.”


고개를 주억거린 수현이 방석 위로 막 자리를 잡고 앉을 때였다. 주방으로 향하던 유진이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몸을 돌리며 물었다. 


 “…… 자네가 괜찮다면 말을 놔도 될까?”


이미 놓고서 묻는 경우는 뭘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수현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수현의 선선한 대답에 유진은 빙긋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유진이 차를 내어왔다. 직접 빚은 듯 투박한 모양의 찻잔을 수현의 앞에 내려놓자, 쌉싸름한 차향이 코끝으로 훅 끼쳐왔다. 녹차였다.


수현은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를 마셔본 게 언제였더라. 그러고 보니 한동안 마신 거라곤 커피와 술뿐이다. 아내는 늘 커피를 달고 사는 자신을 위해 종종 몸에 좋다는 여러 가지 차를 준비해 주었지만, 그 씁쓸한 맛에 늘 마지못해 마시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 세계에 온 뒤로 얼마나 간절했던가. 


수현은 고개를 떨군 채 투명한 연둣빛의 차를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막 끓여낸 차에서 하얀 김이 혼처럼 하늘거리며 빠져나오고 있었다.       


유진은 수현이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이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찻잔을 두손으로 들어 한 모금 삼킨 수현은 더 주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유체상태에서의 우주 간 이동에 대한 글을 쓰셨던데, 그것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


유진은 말없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네 시간이 괜찮다면, 먼저 내 얘기를 좀 들어주지 않겠나?”


유진의 시선은 어느새 수현을 너머 먼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난 말이지, 아주 어릴 때부터 우주를 사랑했어. ……남자아이들이 공룡이나 차에 빠지는 것처럼, 나는 우리를 둘러싼 무한한 우주의 신비에 푹 빠져버렸었지. 언젠가는 전 우주를 누비며 그 비밀들을 하나씩 풀어나가고 싶었어. 우리의 근원인 우주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진정한 삶의 의미 또한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기억 속을 헤매는 듯 아련한 회상에 빠진 그녀의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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