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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니오 Oct 27. 2024

#8. 그날

우주는 어린 시절 이후로 쭉 유진의 반려이자 삶 자체였으며, 그 외에 어떤 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갓 입사한 연구소에서 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 유진은 알게 되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것을 바라보고, 같은 것을 꿈꾸고 있다는 걸. 그렇게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유진과 지훈은 조금씩 사랑을 키워나갔다. 연구 때문에 둘만의 시간을 제대로 가지기도 힘들었지만 그저 서로 옆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를 졸라 간신히 시간을 내어 떠났던 둘만의 첫 여행에서 끔찍한 사고가 있었고, 그 사고로 지훈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유진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후 유진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했다. 이십여 년간 유진의 삶은 이 땅을 떠나 오로지 멀고 먼 우주로만 향해 있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잃은 채,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그러다 초전도 핵융합 실험 중 시간의 문이 발견되었다.


타임슬립으로 시간이동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희망에 들떴다. 유진도 그중의 하나였다. 


시간의 문이 발견된 직후, 누구보다 먼저 연구에 자원한 그녀는 연방정부의 지휘 아래 꾸려진 연구본부에 곧바로 합류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다년간의 연구가 진행되었고, 핵융합 에너지를 조절해 원하는 시간대의 터널을 여는 방법이 밝혀지며, 바야흐로 시간여행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슬립의 안전성을 증명해 정부의 승인을 얻어내고, 상용화에 필요한 프로토타입 제작과 사용 규칙을 정하며 전반적인 관리를 주도해온 것이 바로 유진이었다.


하지만 타임슬립이 안정적으로 상용화된 후로도 유진은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아직은 부족했다. 지훈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유진은 사고 이전 시간으로 돌아가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터널은 그렇게 먼 미래까지 닿을 수 없었다. 현재의 초전도 핵융합 기술로는 기껏해야 몇 시간 뒤로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원하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절망한 유진은 모든 연구에서 손을 뗐다. 낮과 밤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동안 어두운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어둠을 주시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내 삶은 언제부터 끝나버린 걸까? 지훈이 떠나버렸을 때? 아니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지금? 흐린 눈앞으로 우주처럼 막막한 어둠이 끝도 없이 고요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날도 유진은 여전히 어둠 속에 웅크려 있었다. 그 속에서 시간은 이미 멈춘 지 오래였고 몸에선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흐릿한 의식만이 시커먼 혼돈 속을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없이 자신이라는 실재와 멀어지며. 


그렇게 마지막 호흡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몸이 가벼워지며 공중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전신이 엷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투명해지며 세상 속으로 천천히 섞여드는 묘한 감각. 그리고 마침내 처음 느끼는 평온이 찾아왔다.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한 존재에서 벗어나 더 큰 무언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듯한 합일감. 그것은 유진 자신이 세상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아아-! 유진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검은 융단을 펼친 듯 매끄러운 어둠 위로 점점이 흩뿌려진 찬란한 세계가 보였다. 모든 존재가 서로 뒤엉키며 한데 어우러진 하나의 세상.


어쩌면 삶도 죽음도 하나이지 않을까? 우주의 무한한 시공간 속 찰나같은 이 생이 우리의 전부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우리는 이렇게 잠시 머물다 그저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또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 게다. 그 모든 변화의 순간들 모두가 우리이며 세상 그 자체인 게야. 그렇다면 언제 이 땅을 떠나든 그게 무어가 중요할까.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이렇게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 외에.


다음날 유진은 연구에 복귀했다.


삶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한 삶은 아닐지라도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살 수는 있을 터였다. 유진은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자신처럼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을 이 땅에서 자신에게 남은 삶의 의미로 삼으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몇 년 뒤 유진은 연구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마음 한구석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과거에 대한 집착도 함께 놓은 채. 언젠가는 더 먼 과거로의 터널이 열릴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더는 시간을 되돌리길 원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일 테니까.


처음에 유진은 타임슬립을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여겼다. 잘못된 일을 되돌려 삶을 다시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기회라고.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슬립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불행해졌다. 점점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일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슬립을 하려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횟수를 늘려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의 삶이 불완전한 것이 슬립을 독식하는 정부에 있기라도 하듯 불평을 터트리면서. 그들은 슬립횟수가 늘어난다면 그만큼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현재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것이다.      


     




“난 과학자였지만 지금은 철학자에 가까워.”


이야기를 끝낸 유진은 초겨울 해거름 녘의 풍경만큼이나 쓸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우리 할머니는 무당이셨어. 나도 할머니의 신기가 조금 전해졌는가, 어릴 때는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한 번씩 보곤 했었지. 성인이 되면서 어느새 잊고 지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보이기 시작하더군. 자주는 아니더라도 이따금 영(靈)의 기운을 느끼곤 해. 지금처럼 말이야.”


그녀는 턱밑에 양손을 깍지 쥔 채 수현을 보며 싱글거렸다.


흠칫 몸을 뒤로 뺀 수현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욕설을 삼켰다. 제길, 과연 저 사람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게다가 타임슬립의 연구자였다니.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듯한 저 사람에게 따지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때 유진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다 몇 년 전 우연히 유체이탈을 하게 됐지 뭔가.”


수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런 게 진짜 존재한단 말입니까?”


“이 나이 들고 나서 웬만한 것엔 놀라지 않는 나도 처음엔 무척 놀랐지. 육체에서 빠져나온 상태에서 누워있는 자신을 내려보는 느낌이 어떨지…… 자네는 상상이 되는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수현은 식어버린 차를 단번에 털어 넣고는 꼼짝않고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곧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뒤 여러 번 유체이탈을 시도했어. 내가 가진 신기 덕인가 그리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었지. 처음에는 방안을 돌아다닌 게 다였지만 나중에는 유체상태로 바깥을 다니기도 했어. …… 다른 유체를 만나기도 하고 말이야.”


헛! 수현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돌연 유진이 수현 앞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하지만 제일 놀라운 게 뭔지 아나? ……유체상태로는 말이야… 물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어디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는 거지. 그야말로 마음 먹은대로 슝-!”


그러면서 유진은 한 손을 들어 수현의 눈앞에서 휙 하고 날아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손을 따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던 수현은 허공에 시선을 멈춘 채 방금 그녀가 한 말을 곱씹었다. 어디든!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네.” 


숨을 한번 고른 유진의 목소리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 이라면?”


“기억할지 모르겠군. 몇 달 전 태양 흑점이 유례없이 강력하게 폭발한 날이 있었지 않나? 뉴스에서 한동안 떠들어댔는데.”


수현은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입술이 바짝 말라붙는 것을 느꼈다. 그날을 내가 어떻게 잊을까? 이토록 잔인한 운명을 내게 지워준 그 날을.


“그때 나는 유체상태로 있었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하늘 한가운데 열린 문 너머로 다른 차원의 우주를 보았지.”


“다른, 우주라면?” 


“그건…… 일종의 평행 우주가 아닐까 싶어. 무수한 분기로 갈라진, 그만큼의 가능성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들.”


수현은 어안이 벙벙한 채 유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수현이 아닌 아득히 먼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유체상태에서 평행 우주를 봤다니. 그야말로 황당한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정말 그 폭발로 차원이 문이 열리기라도 했다면, 어쩌면, 내가 이 세계에 온 것이 그 때문일지도.’


수현은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미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노인답지 않은 꼿꼿한 자세에서 풍겨나오는 당당함과 그 어떤 것에도 초연해보이는 단호한 눈빛. 수현은 그 흔들림없는 눈빛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지 않은가? 


이윽고 마음을 굳힌 수현은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털어놓았다. 유진의 이야기만큼이나 황당한 그 이야기를.


다행히 그녀는 수현의 말을 믿어주었다. 처음엔 놀란 듯하더니 이내 안타까운 눈빛을 글썽이던 유진은, 이야기가 끝날 즈음엔 떨리는 수현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약속했다. 그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 보겠다고. 


연락을 기다리기로 하고 철학관을 나섰을 때는 이미 미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초여름 햇살이 여전히 강렬했지만 그 밝음이 내심 반가운 수현은 가만히 서서 볕을 받으며 찬찬히 숨을 뱉었다. 납덩이를 얹은 듯 묵직하기만 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있다는 안도감. 어쩌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감각들이 가슴 속으로 조용히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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