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났지만 유진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저도 모르게 계속 워치를 힐끗거리던 수현은 마침내 터져나오는 초조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정작 씩씩대며 가슴께를 들썩여보았자 사실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수현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은 수현의 연락처를 받아두긴 했지만 그녀의 연락수단이래봐야 전기가 들어오는 것조차 신기해보일 정도의 낡은 컴퓨터 하나가 다였기 때문이다. 전원도 불안한데다 통신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때가 되면 연락을 주겠다던 그녀의 말만 믿고 기다리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보다는 의심만 더 깊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역시 모든 게 헛소리였나 보군. ……아니야, 무슨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르잖아. 짐짓 걱정이라도 되는 체하며 그냥 다시 찾아가 볼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거실을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정적을 깨고 워치가 울렸다.
유진이었다.
“연락이 늦어서 미안하네. 일이 좀 있었어. 오후에 시간이 괜찮은가?”
오후라니! 이번 주 내내 곱씹어온 것들을 당장이라도 캐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을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혹시 괜찮으시면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수현의 성마른 대꾸에 유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자네도 알다시피 나야 할 일 없는 노인네 아닌가. 언제든 환영이지. ……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진 말게나.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수현은 전화를 끊고 다급하게 옷가지를 챙기다 묘한 여운이 남는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시간이라……. 이곳에 온 뒤로 시간을 온전히 느끼며 지낸 적이 있었던가. 계절이 바뀌고, 풍경이 변하고, 아이가 자라는 따위의 것들. 수현은 오히려 그런 것들을 어떻게든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악을 써왔을 뿐이었다. 그저 시간을 견뎌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녀가 말한 시간은 어느 세계에 대한 걸까? 이쪽의 세계? 아니면 저쪽의 세계? ……과연 원래 세상에서 내가 속했던 시간은 아직 나에게 유효하기나 한 걸까?
수현은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니는 상념들을 떨쳐내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더는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버리지 않았는가.
그래, 그녀는 뭔가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철학관의 대문은 오늘도 활짝 열린 채였다.
참 태평한 사람이란 말이지.
이 스산한 동네의 그 어느 것도 전혀 꺼리지 않는다는 듯 대범한 그 모양새에 수현은 쯔쯔 혀를 차다말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조금전까지 다급했던 마음도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수현은 낮은 대문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들이밀었다.
마침 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던 유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당황한 수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유진은 눈꼬리가 둥글게 휘며 미소지었다.
그 눈은 ‘이제 우리 둘은 이 세계에서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고 넌지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거실로 들어서자 이미 차 두 잔이 좌탁에 놓여있었다. 방금 우려낸 듯 옅은 김이 올라오는 찻잔 주위로 쌉싸름한 향이 맴돌았다.
자리에 앉은 유진은 수현에게 차를 권하고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향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수현은 차를 두어 모금 마시며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태연히 차만 홀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츰 속이 타기 시작했다.
“혹시… 뭔가 방법을 알아내신 게 있으신지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수현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은 유진이 수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수현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입가엔 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과거 시간의 문을 연구할 때 내가 의심하던 게 하나 있었다네. 물론 추정만 할 뿐 증명할 수는 없는 가설이었지. 하지만 이번 흑점 폭발로 나는 몇 가지를 확신하게 됐어. 내 생각이 맞다면…… 우리가 시공간을 이동하는 건 우리의 신체가 아닌 의식으로 가능했던 걸 거야.”
“의식……이라면?”
“과학적 증거는 없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직접 겪어본 입장으로, 유체는 실제로 존재해. 나도 유체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종의 에너지 같은 게 아닐까 싶어. ……사실 아직까지는 인간의 신체처럼 질량을 가진 물질이 그 자체를 유지하며 차원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해. 슬립을 연구하면서도 우리는 정확히 어떻게 우리가 타임슬립을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했었지.”
수현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가 시간의 문을 통해 타임슬립을 한 게 육체의 이동이 아닌 유체의 이동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유진은 사내아이처럼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육체로는 불가능하지만 유체의 형태로는 가능했던 거야. ……우리가 언젠가 무한한 우주 공간이나 차원을 넘나들 수 있다면 말이야, 그건 물질로서가 아닌 유체와 같은 형태로서야 비로소 가능한 걸 게야.”
그녀의 눈은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수현은 혼란스러웠다.
유체라니……. 그야말로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가 아닌가. 아니 미스테리영화나 괴기영화쯤 되려나.
“그럼… 그 말씀대로라면 유체상태로 차원을 건너 원래의 제 우주로 돌아가는 게 정말 가능하다는 건가요?”
수현이 의구심으로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내 생각은 그래. 물론 그런 가능성은 논의조차 된 적이 없지.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니까. 평행 우주라든지 다중우주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그것조차 여전히 이론에 불과하지 않나?…… 하지만 말이야,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인간의 상상력에 기반해 발전해온 것이잖는가? 증명되지 않는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건 어불성설이지. 우리가 속한 우주에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물질세계는 채 5프로도 되지 않는다네. 그러니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세상만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우리는 우주의 본 모습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걸세. ……내 가정이 맞다면 슬립은 유체의 상태로 시간의 문을 통과한 걸 게야. 그날, 자네를 이 세계로 오게 만든 공간의 문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잠시 말을 끊은 유진이 수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흑점 폭발이 있던 그 날, 자네가 폭발로 왜곡된 시공간의 통로를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우리의 세계로 건너온 거라고 나는 믿고 있어. ……한번 올 수 있었다면, 다시 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나?”
유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실 안으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그저 헛소리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무엇보다 수현 자신이 그 증거니까.
하지만 말투로, 몸짓으로 전해오는 유진의 확고함에도 수현은 여전히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실체가 아닌 유체상태로 시공간을 건넌 거라고? 하지만 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하물며 유체이탈은 무슨 수로 한다는 거지?
수현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내저었다.
“……지난번에 유체에 대해 한번 말했었지? 유체란 흔히 말하는 영혼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야. 하지만 실은 말이지 유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접할 수 있어. 그저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가령… 계단을 내려가다 이따금 지면을 맨 마지막 단과 혼동하고 발을 내딛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때 짧은 현기증을 느끼게 되는데, 그건 그 순간 늘 겹쳐있는 상태의 몸과 유체가 잠시 어긋나버리기 때문이야. 머리로는 한 단을 더 내려간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이미 지면에 부딪혀 멈춰버렸으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종종 겪는 가위눌림도 유체이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어. 물론 약간의 트레이닝으로 누구든 유체이탈을 할 수도 있지.”
유진의 얼굴은 누구나 손쉽게 자전거를 배울 수 있다는 이야기라도 하듯 천역덕스러웠다.
“내가 유체상태로 거리의 제약 없이 돌아다녔다고 얘기했었나? 유체상태에선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먼 거리라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가 있다네. 제아무리 먼 곳에서도 곧바로 자기 몸으로 돌아올 수 있고. 유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거든. 그 끈이 끊어지지만 않는다면 어떤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거지.”
“만약… 그 끈이라는 게, 끊어진다면요?”
수현이 망설이며 묻자 유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눈 아래로 옅은 그늘이 만들어졌다.
“단순히 몸과 멀어진다고 끊어지지는 않아. 거리와는 상관이 없거든. 그게 끊어진다는 건 아마…… 몸과 영혼이 영원히 분리되는 거겠지?”
순간 수현은 전신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영원한 분리라는 건…… 죽는다는 건가?
턱밑까지 치받는 질문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 그때, 언제 그랫냐는 듯 유진이 태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어떤 경위로 세계를 건너왔든 자네의 유체는 아직 원래의 몸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의 자네와 이렇게 멀쩡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빙긋 웃은 그녀는 동의라도 구하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 태연자약한 표정에 벌컥 화가 났다. 도무지 저 사람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수현은 씰룩대는 관
자놀이를 문지르며 애써 감정을 눌렀다.
“문제는…… 그 문을 여는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는 거야. 그때처럼 열려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하지만 통로가 열린다면 자네는 자네가 가진 기억을 토대로 해서, 유체와 이어져 있는 원래 세계의 자신을 찾아가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거지. ……물론 어디까지나 그건 내 심증일 뿐이야.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유체이탈까지이고, 그 이후엔 어떻게든 자네가 헤쳐 나가야만 하는 거지.”
말을 끝낸 유진은 지그시 수현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면, 나의 기억을 따라 평행 우주를 건너 집으로 돌아간다고? 과연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 설사 그녀의 말대로 유체이탈이란 걸 성공했다 쳐도 도대체 언제 문이 열린단 말인가? 일기예보처럼 뉴스에서 예보라도 해주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 이 세계에서 남은 생을 다 하기 전에 그런 날이 오기는 한단 말인가? 도대체 저 사람은 무슨 근거로 저렇게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수현은 의문을 가득 담은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치 그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입가에 미소가 번진 유진이 말을 이었다.
“그 날은 얼마 남지 않았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 또한 다른 세계로 떠날 거야.”
“그, 그게 무슨 얘기죠? 얼마 남지 않았다니…. 게다가 당신도 떠난다고요? 당신은 이 세계 사람이잖아요?”
당황한 수현과 달리 유진은 한층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난 우리의 만남이 그저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다고 하지 않나.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로 이끈 인연의 힘. 이런 의미심장한 우연의 만남이야말로 필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 서로 닿지않는 듯 보이던 두 세계 속의 자네와 내가 그 무수한 가능성을 뚫고 서로 얽히며 만들어낸 하나의 접점. 그것이야말로 실로 기적같은 일이 아닌가?”
말을 멈춘 유진은 벽을 너머 먼 어딘가로 아득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광막한 우주 위로 펼쳐진 무수한 별들의 향연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기적이라…….
수현은 진땀이 배어난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짧은 침묵 뒤, 유진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얘기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