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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니오 Oct 27. 2024

#11. 유체이탈

평행 우주간의 이동, 차원을 건너온 유진의 연인. 그래, 가능할 지도 몰라. 정말 가능할 지도. ……아니, 아니야. 유체상태로 집으로 돌아간다니. 정말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는 거야?


수현은 세차게 머리를 내젓고는 창을 노려보았다. 반질거리는 유리창 안에 같은 모습의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며 창밖의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창 안의 남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수현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유리 위에서 두 손이 맞닿았다. 저 너머 어디쯤에 내 세계가 있는 걸까. 과연 이 몸을 벗어나 그곳을 찾을 수 있을까. 남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수현이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유진이 자신의 말을 온전히 믿어주던 그날 이후, 수현 또한 그녀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수현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에는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리깔려 있었다. 푸르스름한 어둠에 둘러싸인 채 각양각색의 빛을 뿜어내고 있는 도시는 마치 남모를 비밀을 숨겨놓고 의뭉스레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날부터 수현은 신변을 정리했다. 밀린 일정들을 차례차례 처리하고 자신이 떠난 이후 한동안의 스케줄을 비워뒀다. 처음에는 또 무슨 일이냐며 성화를 하던 매니저는 예정된 원고들을 넘기자 더 따지지 않고 순순히 일정정리를 도와주었다. 


개인적인 것들을 정리하는 것은 훨씬 더 수월했다. 이곳에서 수현은 여러모로 주의해서 생활해왔다. 이곳의 삶에 자신의 흔적을 되도록 남기지 않는 게 이 몸의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수현이 없어진다고 해도 이 세계의 그가 자신의 삶을 지속해나가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터이다. 


정리를 마친 수현은 매일 저녁 유진을 찾아갔다. 남은 시간은 한 달 남짓, 어떻게든 그 안에 유체이탈을 배워야만 했다. 그날이 오기 전 모든 준비는 끝나있어야 하니까. 그리하여 마침내 운명의 순간을 마주하는 그때, 수현은 원래의 세계와의 유일한 연결점인 자신의 기억에 기댄 채 우주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제는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남은 기간동안 유체이탈을 어느 정도까지 익힐 수 있을지, 과연 자신의 힘으로 본래의 세상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 모든 게 미지수였다. 유진은 마음의 길을 따르라고 했지만 그 방법은 커녕, 문이 열렸을 때 자신에게 주어질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너무 오래 헤매게 된다면 끝내 줄이 끊어진 채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암흑 속에서 영영 길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수현은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남은 삶 내내 두고 온 세계를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설사 그날이 생의 마지막 날이 된다 할지라도.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수현은 유체이탈에 금세 익숙해졌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는 허약한 편이었던 수현은 조금 무리할 때면 곧잘 가위에 눌리곤 했었다. 그럴 때면 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곤 했는데, 예의 그 방식과 비슷하게 힘을 쓰다보면 손쉽게 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두 번쯤 유체 상태에 빠졌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 그땐 여지없이 꿈이라고 여겼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현은 유체상태로 방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유체를 세세히 제어하기는 힘들었지만 그 경험은 유진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었다. 그저 무모하다고만 생각하던 계획을 점차 확신할 수 있을만큼.


그렇게 보름 여가 지난 어느 밤이었다. 수현이 어느 정도 능숙해진 터라 이제 방안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먼저 유진의 유체가 가볍게 벽을 통과해나갔다. 그리고 수현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벽에 닿는 순간 수현의 유체는 곧바로 튕겨졌다. 생각과 달리 벽은 여전히 단단하게 자신을 막고 있었다. 당황하던 그때 문득 유진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을 뿐, 유체는 눈으로 보이는 것에 구속되지 않는다네.


유체는 물질로부터 자유롭다. 수현은 유진의 말을 되새기며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벽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자 천천히 주변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현은 벽을 통과해 밖으로 향했다.


마당으로 나서자 정원 위쪽으로 몸을 띄운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유진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밤하늘엔 살진 아이의 얼굴마냥 하얗고 탐스러운 보름달이 떠 있었다.


이로써 나는 한층 더 내 세계에 가까워진 것이리라.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현의 가슴 속으로 벅찬 감흥이 솟고 있었다.


그런 수현을 바라보던 유진이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둘은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공중으로 뻗어 올랐다. 이제 그들을 땅으로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중력 너머의 존재였다.


이윽고 밤하늘로 떠오른 두 개의 투명한 유체가 매끄럽게 밤의 시간 속을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우주를 유영하는 쌍둥이 혜성처럼 유유히 평행선을 그리며.






그날 밤 수현은 꿈을 꾸었다.


오랜만에 빠져든 그 꿈은 평소보다 훨씬 생생했다.


꿈속에서 수현은 아들을 무릎에 앉혀 꼬옥 끌어안고는 연신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살이 오른 아이의 작은 몸은 몰캉하니 보드라웠고, 더없이 평온한 속에 가슴은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차올랐다. 온누리에 골고루 나누어져야할 축복이 오로지 저에게만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충만감. 


그때 자신의 허리춤을 안고 있던 아이의 양손이 꼬물거렸다. 수현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코에 와 닿는 아이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달큰한 우유내음 속에 사내녀석들의 꼬롬한 머릿내가 살짝 더해져 있었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데 하루가 다르게 커버리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수현은 곧 흘러가버릴 이 순간의 어떤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양팔에 힘을 주어 아이를 더 꽉 안았다.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대며 뺨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 기분좋은 감각에 스르르 눈이 감겨오는 찰나, 수현은 갑작스레 잠이 깼다.


눈을 번쩍 뜨자 창백한 회색빛 천장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사랑스런 냄새, 부드러운 피부, 온기, 그 어떤 그리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결핍의 공간. 순간 뱃속을 부지깽이로 마구 휘젓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신음같은 흐느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수현은 입을 틀어막은 채 황급히 욕실로 향했다.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내고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충혈된 눈을 부릅뜬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수현은 주먹을 틀어쥐며 거울 속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갈게.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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