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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니오 Oct 27. 2024

#12. 다시 일상으로

마침내 그날이 왔다.


수현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변을 확인했다.


작가로서의 수현. 늘 마음 한켠으로 꿈꿔오던, 이제 다시는 가져볼 수 없는 삶.


그러나 그것은 수현의 것이 아니었다.


서재의 책들을 쓱 훑은 수현은 얼마전까지 앉아 작업하던 원목 책상의 나뭇결을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우둘투둘한 무닛결을 따라 그동안의 기억들이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한 문장, 한 문장, 단어 하나, 하나에도 고심하던 지난한 시간들. 비록 이곳이 나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그 순간들만큼은 진실로 나 자신이었으리라.


현관을 나서자 예약해둔 택시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수현은 집을 한 번 돌아보고는 마음 속으로 작별을 고하며 차에 올랐다. 가볍게 진동하며 몸을 띄운 택시는 이내 요동도 없이 미끄러지듯 목적지로 향했다.


수현은 푹신한 좌석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난 몇 달동안의 일들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눈앞으로 몰려들었다. 지금이라도 눈을 뜨면 그저 한순간의 꿈처럼 여겨질 것만 같은 시간들. 그 시간들이 그저 꿈이길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던가. 이제 내 힘으로 나의 현실로 돌아가리라.


수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떴다.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스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외곽도로의 풍경. 그동안 수없이 오가며 보았던 풍경이지만, 감빛 노을이 따뜻하게 덧입혀진 그 모습은 평소보다 한층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착잡해왔다.


저 풍경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나의 세계에서도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을까? ……그곳 어딘가에서도 유진 씨는 여전히 우주를 보고 있을까?


갖가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즈음, 택시가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갔고 인적없는 교외의 마을은 두터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빠져나오자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 덩그러니 서 있는 철학관이 보였다. 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 스러져가는 낡은 고가의 모양새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폐가였다. 불이라도 좀 켜두면 좋으련만, 오늘도 유진은 언제나처럼 달랑 촛불 몇 개만 켜두고 있는 것이리라.


참 별난 사람이란 말이지. 피식 웃은 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캄캄한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차랑, 하는 풍경소리가 밤의 정적을 흔들며 길게 울렸다.


어둑한 실내에는 향내와 차향이 그윽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숨을 들이켠 수현이 희미한 불빛이 아른거리는 거실로 막 발을 들일 때, 유진이 주방에서 머리를 빼꼼히 내밀며 반겼다.


“어서 오게나, 안그래도 차를 준비하고 있던 참이야.”


유진은 손에 든 찻주전자를 눈앞으로 들어올리며 활짝 웃어보였다.


고개를 까딱한 뒤 자리에 앉은 수현은 주방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저 나이에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심지어 오늘같은 날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오늘이, 그들의 새로운 첫날이 될 수도, 어쩌면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수현은 내도록 가슴 한켠이 묵직한 채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나이답지않은 천진한 미소를 마주하면 늘 그렇듯 스르르 긴장이 풀어져 버리는 것이다.


참 희한한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며 수현은 조금 느긋해진 기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깨끗하게 치워진 좌탁 위로 반쯤 타버린 초 한 자루가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새어들어오는지 불빛은 연신 꺼질 듯 가물거리다가도 이내 다시 살아나며 주위를 옅게 밝히고 있었다.  


잠시 후 유진이 차를 내왔다.


수현과 유진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주 앉아, 천천히 공을 들여 차를 마셨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기억 속에 꼭꼭 새기기라도 하겠다는 듯.


이윽고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채 찬찬히 음미하던 유진이 눈웃음을 지으며 능청스레 말을 꺼냈다.


“자네는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가? 보아하니 이곳에서의 삶도 꽤 만족스러워 보이던데…….”


생각지도 못한 유진의 말에 수현은 어이없다는 듯 눈앞의 웃음기 어린 눈을 마주보았다. 원체 세상사와는 거

리가 먼 사람이기도 했고, 굳이 이곳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거란 생각에 말하지 않았다. 한데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로군. 이런 망할 노인네 같으니.


“제가 이곳에서 좀 잘 나가긴 하죠.”


수현은 한쪽 눈썹을 찡긋 추켜세우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건 진짜 제 인생이 아니잖습니까. 미련은 없습니다. 전 본래의 삶을 되찾고 싶습니다.”


수현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네가 무사히 돌아간다고 해도 그쪽의 삶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르네. 정말 후회하지 않겠나?”


유진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후회할 수도 있구요. 하지만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 부닥치다 보면 또다시 지치고 힘겨워하겠죠. 그렇다 해도 더는 과거에 연연하며 현재를 발목 잡힌 채 살아가진 않을 생각입니다. 전 그저 이 손으로 제 삶을 다시 한 번 꾸려보고 싶을 뿐입니다.”


“좋은 각오군.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나 같은 늙은이야 어차피 남은 시간이 얼마 없지만, 자네에겐 아직 남겨진 시간이 많을 텐데…….”


유진이 말끝을 흐렸다. 수현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에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 또한 제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래도 제겐 가족들과의 추억이 남아있고, 이곳에서는 그토록 꿈꾸던 삶도 한 번 누려봤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요. 어떤 결과가 와도 후회하진 않을 겁니다. 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싶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후회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현이 얘기를 마칠 때까지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던 유진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일세.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며 많은 삶들을 봐왔다네. 삶은 후회의 연속이지. ‘이렇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더 나은 삶을 살 텐데……’. 하지만, 슬립으로 인해 이전보다 많은 선택지가 주어진 지금, 우리는 과연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택의 기회가 늘어난 만큼, 그것이 꼭 그만큼의 축복이 되지는 않아. 어떤 선택을 하던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남게 마련이지. 다만 선택에는 책임이 따를 뿐이라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수현은 유진의 말을 나직이 되뇌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않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말이지, 어떤 선택이든 했다면 다른 선택지를 돌아보지 말고 그 선택에 사력을 다하는 거야.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되도록 말이지. ……완벽한 삶이라는 건 어디에도 없어. 그저 마음을 다한 순간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게 후회하지 않을 진정한 삶이겠지.”


잠시 말을 멈춘 유진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인간의 삶을 가치가 아닌 효율로 따지는 게 요즘의 세태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손쉽게 리셋되어버리는 삶이 과연 진정한 삶일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삶이란 건 그런 게 아니야. 우린 어떤 나쁜 상황에서도 배울 수 있어. 그런 시행착오들도 때론 필요한 게지. 인생이란 하나의 답을 찾아가는 미로 게임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야.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그걸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우리는 다른 결과를 맞을 수 있거든. 시험에 떨어지고 돌아오는 길목에 핀 꽃을 보고, 어떤 세계의 나는 그냥 지나쳐버린 채 절망으로 밤을 지새울 테고, 또 다른 세계의 나는 무심코 내려본 그 작은 꽃 한 송이의 여린 흔들림에 위안을 받아 내일의 새로운 힘을 낼 수도 있을 테니까. ……과거가 바뀐다고 현실이나 미래가 바뀌는 게 아니야. 우리 자신이 바뀌어야, 그때부터 정말로 삶이 달라지는 거지.”


그러면서 유진은 손을 내밀어 수현의 손 위에 살짝 얹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 탁하지 않은 다갈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목울대를 파고들었다. 수현이 흠흠 헛기침을 하는데, 유진이 예의 그 장난스런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그리고 조그맣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수현은 입안으로 천천히 그 말을 발음해보았다. 처음 맛보는 인생의 참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음미하겠다는 듯이.


이윽고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자신의 여건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주어진 생에 감사하며 현재의 순간들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지구상의 평범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수현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삶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벗어나고만 싶었던 보통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돌아갈 수만 있다면…….


시간이 되자, 유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현은 찻잔을 들어 아직 온기가 남은 차를 마저 목구멍으로 털어 넣고는 수련실로 향하는 유진의 뒤를 따랐다.


수련실이라고 해 보았자 별다를 것이 없는 명상을 위한 작은 방 하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일 뿐이었다. 좁은 사각의 방바닥 위로 언제나처럼 두 개의 자리가 단정하게 깔려있고 그 외에는 어떤 가구도 없다. 대신 작은 창으로 비쳐든 달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었다.


초를 살짝 불어 끈 유진이 촛대를 내려놓고 안쪽 자리에 몸을 뉘였다. 수현은 그 옆으로 자리를 잡고 누워 빗물이 새서 얼룩덜룩해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수없이 봐온 얼룩인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새삼스러웠다. 수현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부드럽게 드리워진 채 호흡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은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해버리기라도 한 듯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해 보였다.


수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전신의 힘을 뺀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한동안 집중하는 사이 호흡은 점점 더 느려지고 한층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몸이 심연으로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막 유체로 빠져나오는 참이었다. 돌연 의식이 폭발하듯 터져나오며 주변에 대한 인식이 또렷해졌다.


정원의 풀벌레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어대는 양 선명히 들리고, 달빛이 꽃잎 위로 가만히 내리는 소리, 바람이 풀잎을 슬며시 쓰다듬고 지나가는 소리까지 눈앞으로 그려질 듯 모든 것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치 그 속에 자신이라는 존재가 원래부터 깃들여 있던 것처럼 그 모든 것들과 하나로 이어진 듯한 감각. 그것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더없이 고요하고도 평온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세상 속에 어우러진 감각 속에 잠시 빠져있던 그때, 문득 기척이 느껴졌다.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온 수현이 돌아보자, 자신의 몸 위로 살짝 떠 있는 유진의 유체가 보였다. 이제 정말 가야할 시간이다.


유진을 따라 밖으로 나서니 세상은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긴 채였다. 공중으로 가볍게 몸을 띄운 수현은 손을 뻗어 어둠의 장막 뒤로 펼쳐져 있을 무한한 우주를 잠시 가늠해보다, 먹먹해진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발 밑으로 밤의 세계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과연 육체처럼 형체가 있는 것만이 실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식이나 혼처럼 형체가 없는 것은 허상일 뿐인가? 어쩌면 유한한 육체보다 의식 같은 것이 오히려 더 실체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창백한 달 뒤로 끝없이 펼쳐진 어둠을 눈으로 좇으며, 어쩌면 우리의 존재라는 건 항아리에 잠시 넣어둔 물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우리는 이제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이윽고 먼 우주에서 시작된 초신성의 폭발이 전해왔다. 달 옆으로 한낮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라도 하듯 한순간 밤하늘이 환해지더니, 허공 한가운데에서 눈부신 검은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문이 생겨났다.


유진이 곧바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른 수현이 그곳에서 본 것은 유진에게 들은 것 이상이었다. 천공의 문 뒤로 펼쳐진 수많은 우주들과 그 사이를 넘실대며 찬연히 빛을 뿜어내는 오로라. 수현은 두려움과 경외에 찬 시선으로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때 유진이 수현을 돌아보았다. 곧은 그 시선으로 응원과 격려가 전해왔다. 수현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눈인사를 건네며 마음 속으로 그녀의 행운을 빌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진은 문 너머의 빛 속으로 사라졌다.


수현은 잠시 눈 앞에 펼쳐진 우주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수현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설사 일이 잘못되어 암흑 속으로 환원된다 할지라도 자신은 그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여기에 이렇게 존재했었고,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속에 남을 테니까.


그거면 충분하다, 고 수현은 생각했다.


문득 매일 지겹도록 맞던 엇비슷한 날들이 떠올랐다.


그 시간은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흘러갔지만, 그 모든 순간은 그저 흘려보내서는 안 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매 순간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단 하나의 유일한 생.


돌아가자, 나의 일상으로!


수현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기억과 간절함만을 유일한 지지대로 삼은 채, 무한한 평행 우주 속으로 몸을 띄웠다.      






수현은 꿈을 꾼다.  


화창한 봄날의 공원, 수현은 돗자리를 깔고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본다. 아내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싱싱한 풀냄새와 흙내음이 뒤섞인 봄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오고, 따스한 햇볕이 드러난 피부를 간질이는 여느 주말 오후.


수현은 졸린 눈을 비비며 파란 하늘 위로 유유히 흘러가는 새하얀 구름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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